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헝거 게임 : 판엠이 불꽃>은 독재자가 지배하는 미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거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이 몰락하고 세워진 가상의 국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흥미롭기만 합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신자유주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단상

신자유주의는 가진 자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방식입니다. 1%의 특별한 존재와 그렇지 못한 다수의 공존이 기본인 이 체제에서는 끊임없는 경쟁을 강요받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더욱 명확해지며 사회엔 새로운 독재 공화국이 건설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지독한 에고이즘의 집합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폐허가 된 북미 대륙에 판엠이라는 독재국가가 건설됩니다. 판엠의 중심부에는 '케피톨'이라는 이름의 거대 도시가 자리하고 있고 이곳에 모든 부가 집중되며 주변 도시의 반발이 시작됩니다. 이런 반발을 제압하고 다시는 이런 반발이 일어날 수 없도록 억압하는 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헝거 게임'입니다.

독재자가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반항한 12개의 도시를 지속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으로 도입된 이 게임에는 잔인한 죽음이 존재합니다. 자신에게 반항했던 그들이 서로를 저주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에서 이 게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12개의 도시(구역이라 지칭되는)에서 남녀 각각 1명씩이 무작위로 뽑혀 1년에 한 번씩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헝거 게임'에 초대됩니다. 잔인한 살인을 통해 살아남는 단 한 명만이 모든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이 게임은 판엠에서 가장 주목받는 거대한 행사이자 '케피톨' 시민들에게는 더없이 흥겨운 유희입니다. 로마 시대 검투사들의 죽음의 경기를 보며 열광하듯 어린 남녀의 살육의 게임을 실시간으로 즐기는 이들의 모습은 몰락하는 제국주의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헝거 게임'의 대상이 되고 이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아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인공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는 어린 동생이 '헝거 게임'에 참여하게 되자 자신이 대신 그 게임에 참가하기를 자처합니다. 오래 전부터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던 어린 동생을 지키기 위한 그녀의 용기는 단연 화제가 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헝거 게임'이 개최되는 거대 도시 '캐피톨'로 향하는 기차에서부터 자신들이 살던 삶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엿보게 되는 그들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에게는 과거 우승자들이 멘토로 함께하고 이들을 통해 생존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는 점에서 죽음의 게임에 참여하는 그들에게는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헝거 게임'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지역의 대표가 있는가하면 캣니스의 어린 동생과 비슷한 나이의 참가자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본격적인 생존을 위한 게임은 시작됩니다. 본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강자와 약자가 구별되고 이런 모든 과정들이 하나의 거대한 쇼로 중계되며 분위기는 점점 고조됩니다. 철저한 리얼리티 TV쇼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인 '헝거 게임'은 모든 것을 가진 '캐피톨'에게는 그저 자극을 채워주는 즐거운 게임일 뿐입니다.

하지만 매년 누가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살아가야 하는 12지역의 시민들에게 이 게임은 지옥의 초대와도 같을 뿐입니다. 캣니스는 자신이 속한 12 구역을 대표해 함께한 피타(조쉬 허처슨)가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을 듣고는 흥분합니다. 경기를 앞둔 토크쇼에서 밝힌 피타의 고백은 게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조건이 되어 줍니다.

24명의 참가자들에게는 생존 가능성이 높을수록 다양한 스폰서들이 함께하며 생존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기능을 합니다. PPL을 하듯 게임 중간 중간 절실한 것들을 전해주는 역할까지 한다는 점에서 '헝거 게임'은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빅 브라더'의 마지막 버전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감시사회의 총합으로 만들어진 이 게임은 미셀 푸코가 이야기했던 감시사회의 원형인 '파놉티콘'이나 현대 사회의 감시를 용이하게 하는 '페이스북'과의 유사성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감시탑과 그 탑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감옥을 통해 모든 통제가 가능하다고 한 벤담이 설계한 '파놉티콘'은 감시사회를 이야기하는 데 가장 적절하게 인용되고는 합니다.

위치추적기와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철저하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그들은 게임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다양한 자극적인 요소들을 개입시키며 관람자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반항의 근원은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이어가며 '헝거 게임'이 억압과 속박의 게임이 아닌 반란의 기치를 내세우는 중요한 반역의 중심이 되어간다는 점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영화는 무척이나 단순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관은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가 결국은 '판엠'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도시 국가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영화의 매력은 충분합니다.

이명박 정권과 이 영화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신자유주의의 신봉자인 그로 인해 재벌들은 더욱 많은 부를 얻게 되고 이는 곧 과도한 권력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1%만을 위한 세상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는 결국 극단적인 독재로 이어졌고 이런 결과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도 합니다.

무작위로 진행된 민간인 사찰 역시 이런 탐욕이 낳은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소수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지독한 독재는 결과적으로 다수를 불행으로 이끌 수밖에는 없게 되고 그런 억압이 만들어낸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모두를 몰락으로 이끌 수밖에는 없게 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잔인한 현실에 대한 고찰과 함께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주인공인 캣니스 역의 제니퍼 로렌스입니다. '윈터스 본'이라는 작품으로 영화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는 이후 승승장구하며 할리우드 차세대 여배우의 계보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도 좋을 듯합니다. 매력적인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던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은 3부작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들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후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지 기대되는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세상은 영화로 표현되고 영화는 세상을 이야기 한다. 그 영화 속 세상 이야기. 세상은 곧 영화가 될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영화에 내재되어 있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소통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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