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28일) 오전 선배에게 문대성이 논문을 표절했다는 말을 들었다. 한 사람의 창조적 아이디어나 의견은 고립된 혹은 진공상태의 개인으로서 발현되는게 아니라 문화라는 관습 안에서, 여러 지식이 상호작용해서 나온 결과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식은 넓게 공유되고 전승되기도 하며 지식의 오류가 지적되기도 한다. 한 시대의 통시적이며 공시적인 문화 속에서 계발되는 지식은 널리 공유하는게 마땅하다. 그러나 표절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성과로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문대성의 표절 사건을 접하고 학문공동체에서 생산되는 연구결과로서 논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문대성의 표절 시비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시작해 학술지 논문 그리고 석사학위 논문까지 이어졌다. 학문 분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논문은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기술하여 해석의 지점을 세우는 작업이다. 사회 현상은 양적으로 기술될 수 있고 질적으로도 기술될 수 있다. 유사한 현상에 대해서 상이한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연구자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이론적 기반이 다를 경우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이러한 해석 작업은 타당성과 신뢰성이 확보되면 의미 있는 논문이 될 수 있다.

문대성의 논문들은 100번 양보해도 유사한 현상에 대한 상이한 해석으로 보기 어렵다. 견본으로 사용된 자료가 같으며 해석도 같기 때문이다. 표절 당사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해명이라고 한 건 ‘과도한 인용은 표절이 아니다’라는 것 뿐. 나는 과도한 인용은 표절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과도한 인용은 표절이다. 그리고 표절은 범죄행위다. 한국일보에 의견을 제시한 윤태진 교수는 자신의 학교에서 일부 표절된 학위논문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이는 필자가 소속하고 있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견해가 아닌 타인의 연구성과를 자신의 성과로서 원용한 논문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적어도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연구 윤리가 엄격히 적용되고 있다.

문대성은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석사과정 박사과정까지 마쳤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문대성은 석박사 과정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올림픽 예선전 정도로 본 것 같다. 실제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다수의 학생들은 매일 밤을 세워가며 책을 보고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를 만들기 위해 세미나를 하고 토론회를 한다. 문대성에게 묻고 싶다. 대학원 과정에서 동료들과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치열하게 토론을 했는지.

표절 사건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그때 마다 명확하게 마무리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문대성 말고도 여러 인사들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역시 임시변통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앞으로도 표절 시비는 계속 나올 것이다. 학문공동체에 이런식의 잡음이 계속된다면,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여러 학생들의 논문들과 교수들의 논문이 인용과 인용문의 조합으로 치부될까 우려스럽다. 필자 역시 박사논문을 진행 중이다. 문헌을 탐독하며 한문장 한문장 조심스럽게 주석을 달고, 인용되는 문헌에는 누구의 문헌인지 언제 나왔는지 몇페이지에 있는 문장인지를 밝힌다. 적절한 인용표시가 되어있지 않으면 표절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니는 학과는 신입생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논문작성특강이다. 학부시절 레포트 작성과 많이 다른 학문적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작업을 오래전부터 꾸준히 진행해왔다. 신입생들 또한 논문이라는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문대성이 적어도 이러한 고민을 했다면 지금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석박사 과정에서 공부는 준비운동이 절대 아니다. 학자로서 연구자로서 완성된 지식체계를 만들고자 하는 과정이다.

현재에도 문화계, 체육계 인사들이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논문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우리는 보통 전업박사와 파트타임 박사로 구분한다. 전자는 연구하기를 업으로하려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돋보이게 하려는 소위 ‘박사’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명함에 걸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문대성과 같이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이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면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게 된다. 결석이라던가 발표라던가 하는 부분에서 편의를 봐주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회사일이 있기 때문이다. 문대성은 그게 회사였는지 IOC였는지 동아대였는지는 알 순 없다. 물론 문대성이 불성실하게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원 과정의 최종 결과물인 학위논문에서 잡음이 발생했기 때문에, 학위과정에서 공부한 것도 의심을 받을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해결은 간단하다 문대성이 자신의 논문 작성 과정을 상세히 밝히면 그뿐이다.

과도한 인용이 표절이 아니고 제자의 논문에 무임승차하는 게 관행이라고 주장하면 그건 체육학계의 관행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관행이라고 해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다. 공공장소 흡연이 관행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공공장소 금연이 관행이다. 문대성의 관행은 학문공동체 전체의 관행이 아니다. 체육학회의 관행일 것이고 이 관행은 고쳐야하는게 마땅하다.

학부시절 레포트를 제출하고 지도교수에게 호되게 혼난 경험이 있다. 남의 레포트를 그대로 베꼈기 때문이다. 문대성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이 제출하는 레포트를 문대성 교수는 어떻게 대할까. 물론 문대성이 몸담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은 필자가 학부시절 범했던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대성이 계속해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려고 한다면 이번 사건에 대해 정확한 해명을 해야만 한다. 표절 시비, 그것도 지식을 표절한 사람은 지도자로서 자격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대성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국민대에서도 정확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박사논문 심사는 한 번의 예심과 세 번의 본심으로 진행된다. 심사위원은 5인이며 그 중 한 명 이상은 외부 대학의 교수가 지정된다. 논문 심사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혹을 없애기 위한 장치다. 또한 학교에서는 공개 심사를 권유하기도 한다. 예심의 경우는 공개심사가 의무다. 이러한 과정이 제대로 진행됐다면 표절 시비가 있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문대성의 표절 시비는 대학이라는 상아탑에 그리고 그 곳에서 진행되는 지식 생산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필자처럼 국내에서 학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불명예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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