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봄, 안방극장에 만화 열풍이 몰려오고 있다. SBS 월화 미니시리즈 16부작 <사랑해>(정현정․최수진 극본, 이창한․성도준 연출)를 필두로 <대물> <식객> <바람의 나라> <일지매> <시티헌터> 등 명성이 자자한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속속 안방극장을 찾을 예정이다. 이현세의 <폴리스>(KBS, 1993년), 허영만의 <아스팔트 사나이>(SBS, 1995년)와 <미스터 Q>(SBS, 1998년), 그리고 방학기의 <다모>(MBC, 2003), 원수연의 <풀하우스>(KBS, 2004), 박소희의 <궁>(MBC, 2006)처럼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꾸준히 제작되긴 했지만, 2008년처럼 동시다발적인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2007년 박인권의 만화 <쩐의 전쟁>을 드라마로 옮긴 SBS 드라마스페셜 <쩐의 전쟁>의 성공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그림으로 칸과 칸을 연결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만화의 매체적 특성은 물론, 반드시 현실과 일치해야 할 필요가 없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만화적 상상력이 드라마와 제법 잘 어울린다는 판단도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열풍을 가져온 이유라 할 수 있다.

만화 원작·사전 전작제 드라마 ‘사랑해’ … 대중적 성공도 가능할까

▲ SBS 월화 미니시리즈 <사랑해>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성공 여부는 만화의 매체적 특성과 만화적 상상력을 얼마나 개연성 있는 현실로 변주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원작 만화의 명성이 그대로 드라마의 명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자유분방한 만화적 상상력이 드라마를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화를 드라마로 재창조할 때는 정지된 화면과도 같은 칸으로 시간과 공간을 이동시키는 만화의 판타지적인 특성을 텔레비전 영상에 맞게 현실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김세영이 글을 쓰고 허영만이 그림을 그린 <사랑해>는 따뜻하고 감성적인 내용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만화이다. 드라마 <사랑해>는 만화 <사랑해>에 대한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문 연재만화로 제법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만화가 ‘석철수(안재욱 분)’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자기 만화를 보고 있던 여자 ‘나영희(서지혜 분)’에게 말을 걸다가 성 추행범으로 오해받는다. 그리고 그 장면을 찍은 시민들의 UCC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졸지에 ‘지하철 변태남’으로 낙인찍힌 석철수는 사태를 해결하겠다며 나영희를 수소문한다.

어렵게 나영희를 찾아낸 석철수는 오해를 풀어달라며 나영희에게 해명성 동영상 촬영을 요구한다. 그러잖아도 자기 오해 때문에 곤경에 처한 석철수에게 미안함을 느끼던 나영희는 석철수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여 ‘지하철 변태남’은 따로 있었다고 해명한다. 이렇게 엉뚱한 인연으로 만난 석철수와 나영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만나다가 급기야 혼전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석철수와 나영희의 좌충우돌 결혼 만들기, 그리고 절대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혼전임신 때문에 ‘이영희(박혜영 분)’를 책임져야 하는 젊은 이혼남 ‘박병호(환희 분)’의 결혼 사투기, 여기에 나영희의 언니 ‘나진희(조미령 분)’가 연하의 이혼 전문 변호사 남편 ‘도민호(공형진 분)’와 벌이는 결혼 사수기가 곁들여진다.

만화적 특성, 성공적으로 영상화 … ‘만화 같지 않은’ 드라마

이처럼 <사랑해>는 ‘혼전임신’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를 경쾌하게 다루면서 2000년대 결혼 풍속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이다. 여자가 이해 못하는 남자, 남자가 이해 못하는 여자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여 서로 부딪히고 화해하면서 성장한다는 내용의 <사랑해>는 그동안 로맨틱 코미디에서 많이 다뤘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랑해>는 여타의 드라마들과 달리 만화적인 특성을 성공적으로 영상화하면서 소재의 진부함에서 벗어난다.

▲ SBS 월화 미니시리즈 <사랑해>
예를 들면 나영희가 석철수와의 하룻밤 때문에 임신하게 된 것을 알고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지는 느낌을 화장실 거울에 금이 가면서 깨지는 것으로 표현하거나, 나영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는 석철수의 심정을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리며 갈라지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석철수가 결혼 이후 육아와 집안일에 묶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장면에서 칸 만화의 묘미를 살려 화면을 분할 구성하는 연출 기법도 마찬가지이다. 이 같은 방식은 칸을 이용하여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만화의 표현 기법을 성공적으로 영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화처럼 말풍선을 사용하거나 화면을 분할하는 방식의 표현 기법은 만화를 원작으로 하지 않은 트랜디 드라마에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다. 게다가 만화적 표현 기법은 그동안 로맨틱 멜로 코미디 드라마에서 다소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경쾌함과 발랄함을 넘어 드라마의 현실성을 거세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사랑해>는 만화적 표현 기법을 좀 더 직접적으로 활용하면서도 만화의 판타지와 달리 현실감 있는 영상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만화 같지 않은 드라마의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랑해>의 이 같은 성과는 만화의 판타지를 개연성 있는 현실로 전환시키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드라마 <사랑해>가 만화적 상상력에 근거한 영상 표현 기법 개척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하지만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삽화식 구성의 만화는 단 몇 칸의 그림과 대사만으로도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단막극이 아닌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경우 발단부에서 결말부에 이르는 과정에서 추진력 있는 이야기가 있어야만 하는데, 드라마 <사랑해>는 이야기 구성에서 추진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추진력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시청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따라서 추진력 있는 이야기는 시청자의 기대감과 궁금증을 유발시키면서 시청자가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한계 아직 벗어나지 못해

그런데 <사랑해>는 혼전임신에서 시작한 결혼 이야기를 아무리 서로 다른 성격의 부부 세 쌍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하더라도 동어반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추진력을 갖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석철수와 나영희, 그리고 박병호와 이영희의 혼전임신 에피소드가 동시에 진행되고, 결혼에 대해 강박증을 갖고 있는 석철수와 박병호의 고민이 차별화되지 않아 생기는 도입부의 지루함은 이 같은 한계를 잘 보여준다. 도입부의 지루함은 나영희와 이영희의 차별화된 태도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것은 삽화식 구성의 만화 원작을 발단에서 결말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드라마에 적합하게 풀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입부의 4회 분량만 보고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사랑해>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찌 할 도리는 없다. 왜냐 하면 <사랑해>는 그동안 논의만 무성하고 제대로 시도되지 못했던 사전 전작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사전 전작제는 드라마의 완성도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랑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 따라서 대중성을 검증 받은 원작 만화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사전 전작제라는 장점이 얼마나 성공적인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랑해>는 여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나, 사전 전작제를 시도하고 있는 드라마에 반면교사가 되거나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시청률과 상관없이 <사랑해>의 드라마사적인 의미는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막극의 마지막 보루였던 KBS <드라마시티>가 끝내 퇴출당한 현실에서 원작 만화 열풍이 자칫 드라마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저하시키는 것은 아닌지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윤석진 교수는 2000년 여름 한양대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연극·방송극·영화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4년 가을 <시사저널>에 '캔디렐라 따라 웃고 웃는다'를 발표하면서 드라마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 <한국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상상력>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의 저서와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러로서의 TV드라마 시론> <극작가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충남대 국문과에서 드라마 관련 전공 과목을 강의하면서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학적 특징에 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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