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을, 민주통합당 이계안 후보가 현역의원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에게 거세게 도전하는 이번 총선 최고 관심지역 중 하나다. 이 지역구에 현재 여론조사에서 6~12% 지지율이 나오는 만만치 않은 제3후보가 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 이 사람은 위기에 처해 있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2010년 서울시장 선거 직후 노회찬이 들었던 비난을 이 사람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바로 진보신당 부대표 김종철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지만 지나치게 ‘동안’인지라 정치인으로선 손해를 보는 그다. 일정이 바쁜 정치인인지라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인터뷰를 했는데, 식당 아주머니들이 너무 젊어서 당선이 안 되겠다 말하다 1970년생이란 말을 듣고 놀라워했다. 그에게 직접 그가 처한 위기의 상세한 속사정을 들어 보았다.

▲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강의하는 김종철의 모습

‘김인제’가 될 위험에 빠진 남자

한: 아시죠? 선거 끝나면 ‘김인제’가 될 위기에 처하신 거…

김: 김인제? 그게 뭐야?

한: 아 왜 2010년 선거 끝나고 노회찬을 노인제라 불렀…

김: 아아, 이인제. 그래서 김인제…허허. 그거 참 그러네요…

한: 지금은 통합진보당 대변인으로 건너 가셨지만, 2년 전에 진보신당 대표였던 노회찬이 그 욕을 먹을 때 무슨 생각이 드셨어요?

김: 음… 남명 조식 선생 말씀이 생각났어요. “사람들이 선비를 좋아함은 호랑이를 좋아함과 같아서 살아 있을 때는 그 가죽을 못 벗겨서 안달이더니 죽고 나면 그 이름 그 용맹 드높다 칭송이더라” 죽지 않으면 칭찬을 못 받는 이런 시대……. 근데 그래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요구하는 분들은, 한분 한분으로 본다면 순수하게 요구하지만, 근데 그 순수한 요구의 총합은 결국, 이 나라에 제3정당 따위는 필요없어……. 이런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착한 의도가 모여서 정치발전에 해악을 줄 수도 있는 거죠.

한: 요구가 언제나 일관된 것도 아니죠. 선거 때는 매번 사퇴하라 말씀하시지만 또 민주당이 삽질하면 “왜 저런 민주당을 대체할 정당이 없냐?”라고 또 분통을 터트리구요.

김: 왔다 갔다 하죠. 그러는 게 맞는 거고. 나도 유권자라면 그렇겠지. 고민을 대신 하라고 정치인이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잠시 그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일이 필요하다 믿는다면, 그 비난을 감수해야 하지 않나… 말씀하신 노회찬도 봐요. 지금은 또 다시 존경받고, 말하자면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을 제외한 제3지대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당선권에 있는 후보죠. 현재로서는 반MB에 열광하는 흐름들이 크지만, 저간의 사정을 이해받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용인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 이렇게 생각해야죠. 그리고 지금 상황이 우리가 먼저 야권연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라, 완전히 진보신당을 배제하고 협상이 이루어져 독자출마한 상황이라서, 다른 선택지가 없죠.

한: 진보신당이 야권연대에서 배제된 사정에 대해선 저희가 기사를 하나 썼습니다. http://vo.to/dVa 근데 뭐랄까, 또 어떤 입장에서 보면, 2010년 당시 노회찬 후보가 진보후보랑 단일화를 안 하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 지금의 야권연대 판이 열렸다 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 충분히 그런 시각이 가능하죠. 그때 다 죽어 버렸으면, 그냥 여론으로 압박하면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근데 그런 논리라면 우린 언제든지 죽어야 하는 거죠.

한: 그걸 통합진보당이 지금 빼먹고 있는데 (웃음) 아주 민감한 지역구인 건 아시죠? 정몽준, 떨어뜨려야 하는 사람의 상징성도 충분하고, 이계안, 보수적라고 쉽게 비판할 수 있는 후보가 아닙니다. 두 사람에 대해 어떻게 보세요?

김종철이 보는 이계안vs정몽준

▲ 이계안과 함께 있는 김종철의 모습

김: 이계안부터 할까요? 잘 모르겠다, 는 게 솔직한 생각이죠. 교육감 선거에서 공정택 선대본부장 했었잖아요. 그것 자체로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닌데, 이유가 좀 그래요. 공정택의 광역학군제에 정책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갔다는 거거든요. 서울 어디에 살든 강남이나 목동, 상계동에 있는 학교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건데요. 교육집중과 강남집중을 심화시키는, ‘서울형 혁신학교’와는 또 맥락이 다른, 사교육 중심지구 주변 초토화을 초토화시킬 그런 정책이라 봅니다. 두 번째는, 재벌개혁에 대해서도 뭘 하신 건 없어요. 2006년에 심상정이 재경위 국정감사에서 이건희랑 이학수를 증인으로 채택할 때를 봐도…

한: 이계안이 반대했나요?

김: 기권했어요. 그때 막 심상정이 눈물 흘리고 그래서 화제가 되었죠. 그래서 이계안의 개혁적 이미지는 사실 별로 정책적인 건 아니고 아버지가 좌익이라더라, 연봉의 1/3을 기부했다더라, 이런 것들이죠. 전반적으로는, 뭐 ‘합리적 보수’? 그쯤으로 봅니다. 만나보면 사람은 굉장히 젠틀하시죠. 모나는 발언도 없고. 근데 어떨 땐 맥을 짚어서 정확하게 얘기해줘야 하거든요. 가령 한미 FTA 문제 같은 것도 그런 것 아닌가요?

한: 이계안이 한미 FTA 찬성하나요?

김: 지금은 반대죠. 반대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폐지까지 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그렇죠. 그리고 동작구 뉴타운도 굉장히 크리티컬한 문제에요.

한: 뉴타운 얘기는 이따가 한꺼번에 하겠습니다. 정몽준은요?

김: 정몽준은, 국가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한 게 없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하죠. 근데 이미지는 좋아요. 왜냐하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재벌가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평범한 사람들과 좀 어울려 본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울산에서 왕처럼 살 땐 경험해 본 적 없었던 상당한 수준의 반대파를 지난 4년간 겪어봤어요. 재벌의 권위의식이나 특권의식이 그나마 없는 사람입니다.

한: 하긴 2002년도 노무현과의 단일화 합의 후 끝나고 2차로 포장마차 가서 소주마시자고 했던 게 떠오르네요. 삼성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진 못할 것 같은데.

김: 뭐 좀 그렇죠. 그래서 인물 경쟁력이 상당해요. 사실 동작을은 새누리당 강세 지역이 아닙니다. 박원순 보궐선거 때 보면, 서울 평균적으로 7% 차이 났지만, 이 동네는 14%나 차이났어요. 그러나 여기서 정몽준은 박빙으로 이계안을 이기고 있는 겁니다. 경쟁력 있어요. 근데 인상을 빼면 한 일은 없죠. 무엇보다 새누리당의 수구적 이미지에 계속 기대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한: 그럼 김종철 후보 본인 지지율은 어느 정도 나오고 있습니까?

김: 정몽준이랑 이계안 말고 다른 민주당 후보가 나왔을 때 가정한 여론조사는 12.5% 정도 나왔어요. 동작뉴스란 지역신문에서 했는데 진보신당 지지도가 한 7.5%, 통합진보당 지지율이 4.6% 정도 나옵디다. 이계안 출마 이후 지지율은 6% 정도요?

한: 지난 선거 때는 결과가 별로이지 않았습니까?

김: 지난 선거 때는 2% 받았죠. 진보신당 다른 후보들 평균보다 안 나왔어요. 그때도 관심지역구였죠. 정몽준이랑 정동영이 합쳐서 96%, 그 다음에 나머지 4%의 절반을 내가 가져갔고, 남은 2%의 절반을 민주노동당 김지희 후보가 가져갔죠. 나머지는 또 다른 후보들이 나눠 가졌고 (웃음)

한: 지난 선거 때도 초반 스타트는 좋았다가 나중에 양자구도 굳어지면서 지지율 빠진 것 아닙니까?

김: 지난 번엔 이 정도로 출발이 좋진 않았죠. 그땐 선거 사흘 전에 사당동으로 이사갔어요. 그 전엔 제가 계속 용산에 있었잖아요. 그러니 인지도도 별로 였고 지지를 많이 얻을 수 없었죠. 지난 선거 이후 그동안 동네에서 활동을 많이 해서 이 정도에 이른 겁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선거전이 진행되면 지지율이 다시 빠지게 되겠죠.

한: 완주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본인이 완주를 하면 정몽준 낙선과 이계안 당선을 도와줄 수 있다, 이런 논리라도 계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김: 이계안보다 더 냉정하게 정몽준을 비판할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나 교육문제에 있어 광역학군제의 문제, 동네에 두 개 뿐인 일반고등학교 중 하나인 경문고가 자사고 된 것에 대한 문제제기 같은 게 가능하죠. 경문고가 자사고 되어서 서민들은 황당해진 측면이 있거든요. 등록금이 꽤 비싸지고, 상위 50%가 되어야 입학 자격이 주어지니까요. 그리고 흑석 뉴타운 문제 같은 것들… 근데, 이걸 하다 보면 자꾸 이계안도 해당하는 문제들도 생기고 그러네요. 이계안 입장이 좀 확실하지 않은 면이 많아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정몽준

▲ 기호1번 현수막을 쳐다보며 통화하는 김종철

한: 트위터에서 자꾸 정몽준에게 뭔가를 질의하시던데 그건 뭡니까?

김: 그게 비정규직 문제에요. 현대중공업에서 몇 년 전 군산에 조선소를 지었습니다. 그때 지역여론이 엄청 좋았죠. “와 우리에게도 현대가 온다”라고 사람들이 좋아했죠. 정몽준이 영웅이 되고 군산 명예시민이 되고… 기술연수생으로 1600명을 뽑았어요. 근데 1년 후 정규직으로 채용한게 몇 명인지 아십니까? 10명입니다. 참담하죠. 나머진 그냥 비정규직 하청이고. 노동조건이 엄청나게 가혹하고. 군산미래신문 가서 현대중공업으로 검색해서 보시면 다 나와요. 업무시간이 12시간 막 이러고 급여가 너무 작고 쉬는 시간도 없고 정규직 될 전망도 안 보이고… 그래도 울산 현대중공업엔 노조라도 있잖아요. 물론 와해시키려고 하긴 했지만…군산은 노조도 없어요. 관리직 빼고 생산직은 전원 비정규직으로 되어 있는 것 같던데요.

한: 와… 동희오토도 그렇고 새로 짓는 공장들은 재벌들이 다 그렇게 가려고 하는 듯 합니다.

김: 근데 심지어는 군산시와 전북도로부터 각각 100억원씩 받았어요. 200억원이죠. 일자리 창출해준다고. 200억원을 1600명으로 나눠보면 1인당 1250만원이에요. 그걸 받고도 딱 10명만 정규직 전환시켰어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 결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되는 사람이란 걸 스스로 증명한 겁니다. 그래서 대답해라, 해명하라, 이러는 거죠.

한: 그냥 재벌그룹의 총수라서 비판하는게 아니다, 이런 거죠?

김: 그럼요. 감정적으로 비판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나와 있는데.

뉴타운 반대의 선구자, 김종철

한: 그럼 이제 뉴타운 얘기로 좀 넘어가겠습니다. 중요한 문제잖아요. 근데 이 문제에 대해, 김종철 후보는 발언한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압니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부동산 문제를 제기했다가 사람들의 욕망을 거슬러 (웃음) 저조한 지지율을 얻으신 걸로 기억하거든요? 그땐 몇 프로 나왔죠?

김: 3%요. 그때 얘기한 게 ‘1가구 1주택’이에요. 서울지역에서 주택문제가 심각하니까, 1가구 다주택을 가진 사람을 규제하자. 의무적으로 팔게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한: 어떤 조치를 취하는데요? 세금을 많이 매긴다던지?

김: 그건 아니고. 그렇게 해서는 별로 효과가 없고. 그건 보유세 늘리는, 종부세라든가 이런 방식이죠. 근데 그렇게 세금 올려도 다들 안 팔죠. 우리 얘기는 반강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거죠. 사실 이건 법적인 조치를 수반해야 하기 때문에, 서울시장이 결심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문제제기를 한 거죠.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라고.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은 뉴타운에 대해서, 위험하다, 원거주민 다 쫓아내는 정책이다, 반대를 한 거죠.

한: 뉴타운 반대에 있어서 선구자인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말이 먹히지 않았는데, 이제 한번 광풍이 지나간 후에 또 조금씩 말이 먹히는 그런 상황이잖아요. 2006년이나 2008년 상황에선 뉴타운에 정면도전하는 게 굉장히 무모해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또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고 그런 거잖아요. 그럼 그때 반대하고 망했으니 (웃음), 이제라도 활용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김어준과 정봉주가 잘난 척 하는 건 좋아하지만 좌파들이 잘난 척 하는 것은 싫어 하잖아요. 근데 잘난 척을 해도 싫어하고 안 해도 싫어하니 이 경우엔 좀 깔대기를 세워줘야 할 것 같아요.

김: 말 만들어 볼까요? 선견지명? 미래의 예언자?! 일관된 정치인?!?! (웃음)

한: 설명을 좀 해주시죠. 당시에 내가 이렇게 경고했는데, 동작을에서 지금에 와서 이렇게 실현되었다. 뭐 이런 식으로.

김: 제가 그때 했던 말과 지금 하는 말이 같아요. 2008년 총선에서는 미아 길음 뉴타운이라는 선례를 보고 판단한 거든요. 원거주민 정착률이 15% 밖에 안 되었단 말이죠. 그래서 동작구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아니 사실은 더 나쁜 거죠. 왜냐하면 앞으로는 아파트 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원거주민 정착률은 거의 제로가 될 거라고 예상한 거죠. 서울 바깥으로 나가야 하거나, 아니면 거기 정착하려면 굉장한 빚을 지거나. 뉴타운은 아니지만 사당에서 진행 중인 재개발 지구가 있는데, 원래는 땅 한평에 아파트 한 평을 주기로 했어요. 근데 막상 건물이 다 올라가고 줘야할 때가 되니까, 30평 아파트를 받으려면 3억을 더 내놓으라는 상황이 된 거에요.

한: 왜 자꾸 비용이 올라가죠?

아파트 값이 내려가는 시대의 뉴타운

▲ 그림으로 그린 명함 사진.이 그림이 실물보다 나이 들어 보여 사람들에게 더 정치인처럼 여겨진다 한다.

김: 공사비용이 들어가고,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니까, 분양이 안 되니까, 원래 있던 주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들이 늘어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재개발이나 뉴타운이 땅을 내놓으면, 땅 내놓은 사람에겐 아파트 주고, 나머지 지은 아파트를 일반분양으로 내놓아서 메꾸는 방식인데, 지금 일반분양의 아파트 가격을 높게 정하면 아파트 분양이 안돼요. 그러면 아파트 가격을 낮춰야 하잖아. 그러니까 공사비용은 원거주민에게서 채워야 하는 거지. 이미 자기 집은 헐렸는데, 어떻게 돌아갈 수도 없고. 돈을 내거나 나가야 하는 거지.

한: 그러니까 뉴타운의 이해득실이란 게 아파트 값이 계속 상승할 거라는 걸 전제로 책정되었기 때문에…

김: 그런 겁니다. 06년도부터 이 얘기를 했죠. 그리고 실제로 보면 건설사가 횡포가 심해요. 다 잘해줄 것처럼 말해놓고, 인감증명 띄어오게 하고, 소위 서면 동의서라고 해서 그 동의서 하나만 받아놓으면 그 담부턴 밀어붙여요. 그리고 폭력으로 진압하고. 이게 뉴타운의 미래죠. 이게 뻔히 보이는데도, 뉴타운 추진세력이 있죠. 건설사와 결탁해서 이익을 많이 남겨먹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100%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전반적으론 그렇죠. 그럼 이런 상황을 다 설명하고, 주민들이 대부분 동의한다든지 할 때 그럴 때 추진해야 할 텐데, 이런 솔직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어요.

한: 2008년도 이럴 때 당시엔 주민들이 뉴타운에 거의 찬성했죠?

김: 예. 당시엔 거의 찬성했죠. 일단 현실적인 욕구가 있어요. 집이 낡아서, 실제로 다시 지어야 할 필요가 있는 집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근데 지금 같은 방식으로 하면, 집을 새로 짓고 싶다는 욕망은 충족이 되는데, 문제는 그게 내 집이 아니라는 거에요. 내 집을 헐어서 남의 집을 지어주고 쫓겨나는 거죠. 정책목표랑 안 맞는 거죠.

한: 무슨 악마의 소원 들어주기 같은 상황이네요.

김: 그리고 낙후된 동네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가, 그 집 하나라도 없으면 자기를 보호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그런 사람들한테, 저 아파트 새로 지어준다 그러고 꼬셔서 저러면 안 되는 거죠.

한: 국가적 사기?

김: 재개발 사업은 일단은 민간사업인데, 준공공사업처럼 하니까, 국가가 방치하는 사기인거죠. 자기들이 원해서 한 거다, 니들이 스스로 조합 만들지 않았냐, 이런 핑계를 대거든요. 그러니까 법적으로 보장하는 사기를 벌이는 거죠. 찬성하는 몇 명 말고, 이미 반대로 돌아선 시민들도 말고, 집을 새로 가지고는 싶은 중간파 유권자들 만나면 제가 객관적으로 설명을 하죠. 자료도 받았어요. 상계 뉴타운이 앞으로 추가 분담금이 몇 억이 생길 거란 보고서 같은 거. 민주당 출신 노원구청장 김성한이 만들었죠. 08년 총선에 16% 넘게 얻어서 노회찬을 떨어뜨린 그 사람 (웃음). 지역에서 경쟁력 있는 사람이죠. 하여간 노원구도 이제 뉴타운을 벗어나려고 하는 거야. 객관적 데이터가 필요하니까 그걸 만든 거야. 그런 걸 보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반대에 동참하게 되고 그러죠. 여하튼 뉴타운 찬성파들도 좀 솔직해야 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한: 그럼 뉴타운 문제에 얽힌 주민들 앞에 나가면 어떤 말씀하세요?

김: 말을 길게 할 수가 없어요. 짧게 해야 합니다. 주민들이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구요. 내 앞에서 정몽준이나 이런 사람들이 말을 굉장히 길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말을 짧게 하면, 막 박수를 치죠. “역시 진보는 멋있어!” 뭐 이러면서 (웃음) 근데 약간 공식적으로 얘기를 해야 하는 시점에선 주로 우리가 처한 상황과 복지 얘기를 합니다. 대표적으로 하는 얘기가, 제가 1970년생인데, 그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102만 명이다. 그 다음해에 태어난 71년생이 내가 알기론 제일 많은데, 104만 명이다. 근데 작년에 태어난 아이가 47만명, 그전 해는 44만명. 그러니 우리 70년생이 80살이 될 때 쯤에는, 그때에 40살 인구보다 1.5배는 더 많을 거에요.

한: 80살 중에는 돌아가신 분들이 있을 텐데도?

김: 그렇죠. 그러면, 이 단계로 가면은, 내가 보기에 가난한 노인들은 다 자살해. 그러면 우리가 복지제도의 틀도 다시 짜야 하고, 정년에 대한 합의도 다시 만들어야 하고, 노인일자리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하죠. 증세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어마어마하게 해야 할지도 몰라요. 여기 계신 노인분들이 무상이나 복지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게 우리가 처할 현실이다.

한: 근데 보수언론에선 오히려 반대로, 어차피 노인인구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복지제도를 늘려놓으면 나중에 감당을 못한다, 이런 논리인 거 아닙니까?

김: 근데 그런 식이면,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복지를 하는 건데, 어려울 테니 하지 말자니. 그러면 젊어서 일할 때 받는 소득을 늘려준다고 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기업의 지출을 강제해야 할 테고, 어차피 거기에도 증세는 필요해요.

한: 진보신당 주요 공약 얘기도 좀 해볼까요?

김: 오늘(3월 20일) 핵심공약 떴는데요? 2030년까지 탈핵하겠다는 것과 종교인 과세 공약이랑 등등. http://vo.to/dVb

한: 종교인 과세 공약이 인기던데요?

김: 예, 꼭 피하겠다는 것 다섯 가지랑 꼭 하겠다는 것 다섯 가지랑 합해서 열 개에요. 구체적 공약은 단계적으로 나올 겁니다. 좀 소프트한 것들도 채택하려 합니다. 의무교육 일환으로 수영이나 악기 가르친다 이런 거.

한: 악기는 노회찬이 만들어 놓고 간 건가요?

김: 아니 뭐 우리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있었던 공약이지. 스웨덴 사민당 거 참조해서. 그리고 핀란드는 수영하고 자전거가 의무교육이래요. 수영은 물에 빠졌을 때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운동이고, 자전거는 여가 생활의 도구니까. 학교에 수영장 좀 늘리고, 다 만들기 힘들면 지역 수영장과 좀 연계하고. 악기도 하프나 이런 건 다 대줄 수 없지만, 그런 고가 악기 경우엔 본인 비용도 좀 대고, 나머지 악기는 좀 정부에서 대주는 방향으로.

한: 축구팬들 위해서 풋살 경기장 확충은 어떻습니까?

김: 풋살? 짧게 하는 축구 그거? 여튼 동네 있으면서 늘상 생각하는 정책은, 생활체육을 강화하는 거에요. 이게 중요한 문제죠. 장소도 지원해야 하고, 전직 선수들이나 이런 사람들을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에서 고용해서 순회를 하거나 그러면 사람들이 좀 더 모일테고. 상당히 더 활성화되겠죠.

고등학교 땐 좀 놀았던 ‘사회주의 패망 세대’

한: 개인사 얘기를 좀 하다가 끝마칠까 해요. 예전에 시사in에서 같이 진보신당에서 부대표 하시는 강상구와 민주통합당 대변인 하시는 박용진과 함께 묶었습니다. ‘강경대 세대’라고.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 쑥쓰러웠죠 뭐.

한: 명명에 동의하십니까?

김: 글쎄. 달리 규정할 방법이 없어서 그런 거에요. 세대를 규정하려 하는데,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사실 우리는 사회주의 패망 세대라고 봐야지.

한: 그래서 선배인 386세대와도 좀 감성이나 태도가 다르다?

김: 완전히 다르다.

한: 어떻게 다른데요?

김: 예전에는, 우리 나아가는 길이 ‘과학’이라 믿는 ‘신념’의 운동이었는데, 우리부터는 이 길을 ‘도덕’이라 믿는 ‘정서’의 운동으로 바뀐 거 같아요. 절대적인 어떤 올바름은 사라졌고... 그게 뭐 다른 나라에선 수십 년 전부터 그랬다는데, 우리나라엔 80년대에도 ‘과학자’들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한: 90학번이시잖아요? 그럼 대학교 2학년 때 소련이 망한 건데, 소련이 망할 때 무슨 생각하셨어요? 그전에도 운동권이셨어요?

김: 음, 그전에도 운동권이었어요. 근데 일단 전 고등학교 때 많이 놀았어요. 나이트클럽 가고, 당구 300 치고, 남녀공학이라서 많이 놀았어요. 학교는 다 남녀공학으로 바꿔야 해. 제가 없애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강제론 힘들지만 정책적으로 전환시켜야 할 거는, 남고, 여대, 성별을 구분하는 학교와 계층을 구분하는 학교 다 없애고 싶죠. 하여간 놀다가 재수했고. 원래 나는 이과, 천문학과 지망하다 떨어졌는데, 재수할 때 문과로 바꿔서 경제학으로 갔죠. 하여간 그만큼 난 좀 혼자서 뭘 고민하는 걸 좋아했어요. 천문학이란 게 좀 그런 거 아니에요? 저 별들의 빛은, 어, 어디서 오는 거지? 반짝이는 별과 반짝이지 않는 별들 중 가까운 건 뭐지? (웃음) 그러다가 문과로 바꾸고 정치도 하게 되니까, 전 솔직히 소심해요. A형에다가. 집에 있을 땐 전화도 하기 싫고 그냥 유튜브 보면서 시간 때우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퀸 1986년 웸블리 공연이나 이런 거 보면서. 비틀즈 공연 중에 미국 처음 공연이 워싱턴 디시에서 한 공연있는데, 뉴욕 어디 스타디움 공연, 보고서 쓰러지지. (알 수 없는 얘기들이 좀 더 이어짐) 그런 오타쿠적 기질이 좀 있어요. 유튜브 한번 들어가면 꼬리에 꼬리를 물잖아요. (다시 뭔가 알 수 없는 얘기들이 이어짐) 그래서 밤샌 적도 많아요.

한: (소련 망했을 때 무슨 기분이었는지 질문은 실종되고 다시 맥을 잡지 못함) 집안 환경은요?

결혼, 그리고 정치인의 길로

김: 가난했죠. 큰형 작은형이 번갈아 도시락 싸가고 그랬단 얘기를 들었어요. 근데 아버지 어머니가 워낙 성실하시다 보니까, 가정형편은 점점 나아졌죠. 근데 그러다 형이 수배되고. 형이 운동권이었죠. 운동을 굉장히 세게 했죠. 82학번이었는데. 형은 CA였다가 나중에 NL로 전향했던 것 같기도 하고? 결과적으론 형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형은 농민운동하려고 농촌 내려갔는데 지금은 그냥 지방에서 이것저것 하고 있고, 작은형은 회사하고 있고. 큰형이 운동한다 할 때는 아버지랑 맨날 싸웠는데, 큰형 수배당했을 때 아버지가 방에 있는 책을 보고 생각을 바꿨어요. 그담부터는 제 후견인이 되셨죠. 정치경제학 원론 보고 막 나한테 질문 던지고. 내가 당황해서 “어어, 좀 공부해서 다시 답변할께!” 그러고 (웃음)

한: 아니 그럼 회사 다니면서 결혼하셨다고 들었는데 회사는 언제 가신 겁니까?

김: 그건 병역특례. 우리 때엔 현역자원이 많아서, 군대보내 놓으면 수용할 데가 없으니까, 좀 준비하면 다른데 빠질 수 있었어요. 학생운동 5년 하고 나서, 아버지는 큰형 따라 시골 가시고 그런 상황이라, 특례 공부했는데 마침 되어 가지고, 한 4년 했어요. 소프트웨어 회사. 30명 정도에서 시작했는데 나중엔 120명, 소프트웨어 회사 치고는 꽤 커졌죠. 근데 벤처기업 붐 꺼지고 나서는 또 어려워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한: 아내가 같은 회사 직원이요?

김: 회사 상사. 아무래도 제가 꼬심을 당한 거 같아요. 물론 와이프는, 이럴 줄 모르고 절 꼬셨겠지만. 나중엔 멀어지려고 그쪽에서 회사도 옮기고 그랬는데 그때는 제가 따라가서 붙잡았어요. 병특 후반기에 결혼을 했죠. 2년 좀 더 넘게 연애를 하고. 근데 98년에 복학해서 보니까 IMF 직후라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 하고, 이런저런 강연은 많고 그렇더라구요. 난 97년 국민승리21 때는 병특인 상태로 잠깐 잠깐 자원봉사만 했거든. 학교 다니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회사에선 계속 나오라고 해서 휴직을 내고 온 상황이었고.

▲ 신혼여행 사진

한: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셨나 봅니다?

김: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 후에 2천년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진출 못했을 때도 회사 사장이 와서 “힘들지? 그거 힘든 거야~! 종철씨! 와서 돈 좀 벌고 다시 가!!”라고 했었죠. 하여간 그땐 그래서 운동에 도움이 될 일이 뭐가 있는가 고민했는데, 사법시험 고민도 했었죠. 같이 운동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사법시험 공부 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다들 하는 거 보니까 나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웃음) 대한민국 법조계는 곧 진보하겠구나 싶었죠 (웃음) 그래서 생각하다보니, 요즘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민주노총 가보려 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됐어요, 또. 그 당시 정파구조도 복잡하고. 그러고 있는데, 친구인 박용진이, 내가 그렇게 기웃기웃 거리고 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하이에나처럼 나타나서 (웃음) 국민승리21에서 권영길 대표 비서로 얘기해 봐라. 그 당시엔 최기영 혼자 비서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새끼 비서 역할을 하게 되죠.

한: 훗날 일심회 사건(*2006년 검찰이 발표한 간첩사건. 민주노동당 분당을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유명한 사건이다. '일심회'라는 단체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간첩사건으로서는 조작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래서 PD들은 일심회 관계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한편 북에 당직자의 신상정보 등 당 내부정보를 제공했다고 알려진 최기영 등을 당규에 의거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NL들은 그것은 검사의 주장일 뿐이며 동지가 부인하면 믿어줘야 하는 게 우리의 정체성이라 맞섰다. 2008년 2월 ‘심상정 비대위’가 최기영을 제명하는데 실패하면서, 선도탈당한 조승수 등에 이어 노회찬·심상정까지 탈당하면서 진보신당이 결성되었다)을 일으킨 그 최기영이요?

김: 아 그랬죠. 그래서 사적으론 최기영이랑 엄청 친한 사이에요, 내가. 하여간 그때 박용진이 꼬신 방법은, 그렇게 3~4개월 열심히 하면 권대표가 추천서 써주시지 않겠냐, 민주노총에. 듣고서 나는 아 그거 좋은 방법이다, 이러고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뭐…

한: 낚인 거죠 뭐 (웃음)

김: 그런 게 어딨냐, 말뚝 박아라 그냥… 이게 99년이죠.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온다면…

한: 박용진과 원래 친분이 있으셨군요. 학교는 다르실텐데.

김: 학교는 다른데, 학번은 같고 그랬으니 교류가 있었죠.

한: 이번에 민주통합당에 가셨는데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김: 전 반대했죠. 아니 뭐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개인적으로도. 처음엔 간접적으로만 들었는데, 우리는 그때 통합파vs독자파 논쟁으로 정신없었으니까. 근데 통합파 안건이 부결되고,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나간 다음에, 나간다고 하기에 반대했지. 민주당 가서 잘 될 확률도 별로 없어 보이고. 길게 보아서 하고 싶은 정치를 할 수 있겠냐고 했지. 저도 이제 동작에서 민주당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고, 이합집산과 이해관계가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데, 그걸 헤쳐나갈 수 있겠느냐.

한: 민주통합당이 ‘좌파 투항자’들을 대접해 주려 했다면 주대환이나 박용진 정도의 지역구는 살려줬어야 했을텐데 현실에선 그게 잘 안 됐죠.

김: 그럼요. 그게 될 수가 없어요. 한번 들어오면 다시 나갈 수가 없다는 걸 다들 아는데 챙겨줄 필요가 없죠. 집토끼인데. 현실정치에서 “다 합쳐서 그 안에서 뭘 도모해 보는 게 어떠냐”란 말이 결국엔 의미가 없고 작동할 수 없는 조언인 이유가 그런 거죠. 정치란 건 지지자들과 노선의 결합이고, 그걸 정치인이 매개하는 건데, 노선과 지지자들이 분리되어 있으면, 남는 건 이상한 방법을 동원해서 그걸 메꾸는 건데, 그러다 보니 지지자들이 사라진 진보정치인이 민주당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그 구조와 문화에 동화되는 거에요. 돈 어디서 꿔와야 하고.

한: 근데 그런 측면 말고 이제 좌파들 쪽에서도 한번 넘어가면 변절자라 욕하니까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하는 원인엔 그런 부분도 있는 거잖아요?

김: 정치라고 하는 건 어려운 조건에서 이런 선택을 하기도 하고 저런 선택을 하기도 하잖아요. 심지어 우리가 정동영 의원도 원래부터 민주당에 있었고 지금도 민주당이지만 진보적으로 바뀌었다고 환영하는데, 원래 진보였다가 민주당으로 간 사람들은 때려 죽일 놈 취급하고 그러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해온 것이 있는 거고… 저는 뭐 그 사람들이 함께 결정한 걸 지키지 않았다는 신의의 문제는 제기할 수 있지만, 반동 비슷하게 모는 걸 동의할 수는 없어요.

한: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다시 판단을 바꾸어 돌아온다고 하면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구요?

김: 그렇죠. 근데 저는 만일 다시 합류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나름의 과정은 거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판단을 바꾸었는지 경위도 설명하고, 신의를 어긴 점은 사과도 좀 하고. 왜냐하면 정치에도 안정성이란 게 있는 건데 왔다 갔다 하는 게 기본이 되어 버리면 곤란하니까요.

다시, 위기의 ‘김인제’

민주노동당에 투신한 후 김종철의 가계를 유지하는 데엔 아내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김종철의 벌이라고 해봤자, 일주일에 3만원 받고 다니던 국민승리21 시절을 지나, 민주노동당이 공식적으로 창당되고 당비내는 당원이 조금 많아지면서 월 50만원을 받게 된 정도다. 원내진출을 한 2004년 이후에는 월 100만원이 되어 좀 살만(?)해지나 했더니 대변인실을 떠나 최고위원이 되어 90만원 밖에 못 받게 되었단다. 그 다음엔 거기서 또 긴축재정을 해야 한다고 임금을 20% 삭감하여 72만원을 줬다.

이 과정을 본 아내는 남편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벌이에 한계가 있는 일반회사를 떠나 보험을 팔게 되었다. 그 후엔 보험팔이가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해 홍대 앞에서 옷가게도 했었다. 클럽데이 날엔 밤도 새야 하는 그런 옷가게였다. 김종철은 그때 함께 동대문에 옷을 받으러 가 “아 이게 한국 자본주의의 토대이며 본모습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김종철보다 그 부인의 모습에 감정이입을 할는지도 모른다.

▲ 어린 시절의 아들과 밥을 먹는 모습

중학생 자녀와, 다시 보험영업을 시작한 비정규직 아내를 부양하는, 혹은 부양받는 김종철의 꾸준한 도전은 지금으로선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야권연대에서 배제당한 이들의 도전엔 가장 강한 야권연대의 압박이 가해진다. 사람들에게서 단일화를 요구하는 문자와 전화가 선본에 쇄도한다. 그러나 언론이 ‘통합진보당’에게 ‘진보당’이란 약칭을 쓰면서 희미해진 진보신당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정당투표 3%를 넘어 청소노동자 김순자와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를 여의도에 진출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이, 동의받지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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