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필자는 재수생이었습니다. 아침 8시부터 자율학습 일과가 시작하는 재수생 종합학원 교실에 100명 가까이 되는 잠재적인(?) 경쟁자들과 함께 부대끼며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재수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공감하지만 필자에게 재수생 시절은 가장 추억이 많고 무엇을 함께하면 즐거웠던 '호우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습니다. 1994년 6월 미국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는 잠시나마 수능에 대한 걱정을 잊게 해줬습니다. 그리고 월드컵 열기가 사그라지던 7월에는 교과서에서 늘 접했던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여 세상을 들썩이게 했습니다.

유난히도 땡볕이 내리쬐던 그해 여름, 학원 교실에서 케케묵은 에어컨 냄새가 진동하던 그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제게 워크맨을 건네주며 새로 나온 노래인데 참 좋다며 들어보라고 권합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늘 전교 1등자리를 놓치지 않던 이른바 '수재' 였습니다. 아깝게도 대한민국 최고의 국립대학 문턱에서 미끄러져 '1년 후퇴'를 선택한 친구인지라 그 친구가 갑자기 노래를 들어보라고 권하는 게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친구도 노래를 듣는구나'라는 생각하며 이어폰을 끼었습니다. 노래를 듣는 순간 땡볕이 내리쬐던 그 여름 제 몸에서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노래가 있었다니, 그 노래는 바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었습니다.

갑자기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을 꺼내든 이유는 이번 주 새로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고난 후 노래의 여운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서입니다. 18년 전 모든 감성을 마비시켰던 그 노래가 스크린 속에서 다시 한 번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의 감성을 진하게 자극합니다.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영화 '건축학개론'을 음미해보고자 합니다.

건축사무소에서 책상에 쪼그려 앉아 새우잠을 자면서까지 일에 여념이 없는 건축사 승민(엄태웅)앞에 어느 날 손님이 찾아옵니다. 손님은 다름 아닌 15년 전 승민의 첫사랑이었던 서연(한가인)이었습니다. 서연을 좀처럼 알아보지 못하는 승민의 모습은 마치 예전의 기억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강남에 살고 있고, 고급 외제 승용차에, 최고급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전형적인 부잣집 사모님으로 나타난 서연은 승민에게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에 새로 살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승민은 다른 건축가들도 많은데 굳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이유를 묻습니다. 영화는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1990년대와 2010년대를 넘나들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칩니다.

1994년 건축학개론 강의를 수강하러 온 서연(배수지)을 우연히 본 승민(이제훈)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서연이 승민과 같은 동네(정릉)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건축학개론 수업 과제를 함께하며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공부밖에 몰랐던 '숙맥' 승민은 점점 서연에 대한 감정을 키우게 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동네 절친인 재수생 납뜩이(조정석)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서연에 대한 승민의 사랑을 이루는 데 눈에 보이는 가장 큰 걸림돌은 승민의 같은 과 선배이자 서연과 같은 방송반 동아리에 있는 선배 재욱(유연석)의 존재입니다. 돈 많은 강남부자에 잘 생기고 키도 커서 같은 동아리 여학생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하고, 거기에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재욱에게 서연 또한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승민은 재욱에 대한 열등감 탓에 서연에게 과감하게 다가서지를 못합니다. 결국 재욱과 서연의 관계에 대한 오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에 대한 소심한 확대해석 등이 겹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안타까운 마무리로 향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1990년대 대학시절을 겪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성과 사물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대사 곳곳에 당시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재치 넘치는 대사들이 넘쳐납니다. 가령, 선배 재욱(유연석)의 작업실에 놀러간 승민이 새로 장만한 PC를 '펜티엄급에 하드가 1기가(1GB)'라고 재욱이 설명하자 "1000메가바이트(1기가=1000메가바이트)면 평생을 써도 남는 용량 아니냐"고 얘기하는 장면은 당시를 살았던 이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디테일을 섬세하게 살려놓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를 비롯한 X세대(일반적으로 1968년에서 1976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통칭함)들의 유년기에 가지고 있던 아이큐2000 컴퓨터를 보면서 이런 PC를 능가할 제품은 없을 거라고 떠들썩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펜티엄이 처음 나왔을 당시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도 떠오르게 합니다.

1990년대의 서연이 듣고 있는 전람회의 CD와 덩치 큰 미니 CD 워크맨도 당시의 기억을 살려놓습니다. 미니 CD 워크맨은 당시 일본 소니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았었는데, 테이프를 꽂아 넣고 듣는 카세트 워크맨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하여 훨씬 더 뛰어난 음질로 감상할 수 있었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습니다. 손가락만한 MP3 플레이어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큼직한(?) 미니 CD 워크맨은 초창기 벽돌 같은 모토로라 휴대폰을 보는 듯한 느낌일 것입니다.

재수생 친구로 등장하는 납뜩이는 통이 크고 기장이 긴 힙합바지를 입고 나오는데,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그룹 듀스가 즐겨 입은 복장을 따라 하던 풋풋한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승민이 입은 티셔츠는 당시 최고의 유행을 끌었던 메이커 게스(GUESS)의 짝퉁 티셔츠 GEUSS였는데 당시 유행하던 유명 메이커 짝퉁 티셔츠들, GEUSS뿐만 아니라 GUESS의 마지막 S자를 빼고 T를 넣은 GUEST 티셔츠 등도 새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짝퉁 티셔츠는 영화 종반부에 예상치 못한 감동코드의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무한대의 사랑과 자기희생을 새삼 느끼게 해줍니다.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015B의 '신인류의 사랑' 등 당시 최고 인기 유행가들도 스크린에서 되살아나 추억에 빠져들게 합니다. 이런 고증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것은 역시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감정과 사소한 오해로 빚어지는 망설임 등을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20대에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소심한 짝사랑과 망설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사랑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속설처럼 15년 전의 승민(이제훈)과 서연(배수지)은 사소한 엇갈림과 오해로 인해 결국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채 멀어지게 됩니다. 첫눈이 오는 날 정릉에 주인 없는 한옥집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간직한 채 15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집을 매개체로 다시 만나고 먼지 쌓인 책처럼 좀처럼 열어두지 못하던 서로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차근차근 열어 확인하게 됩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은 영화 전반에 걸쳐 90년대의 추억과 함께 선사됩니다. 그런 애틋함을 잘 살아날 수 있게 한 원동력은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용주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과 함께 주연배우인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배수지 등이 자신의 캐릭터를 잘 살려낸 덕분입니다. 또한 승민의 재수생 친구로 나오는 납뜩이로 등장한 조정석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오는 장면마다 재치 넘치는 대사들로 관객의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자칫 지루한 흐름으로 갈 수 있는 영화에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남자 주연인 엄태웅이나 이제훈 등은 워낙에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들이라 영화를 보기 전부터 연기력에 대한 신뢰도를 충분히 심어주었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자 주연을 맡은 한가인과 배수지는 다소 불안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가인의 경우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히로인이었지만 발연기 논란에 휩싸였으며, 한가인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배수지는 아이돌 그룹 멤버(MISS A)라는 점이 한계로 작용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두 배우 모두 연기력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할 만큼 자신의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 냈습니다. 배수지는 연기자로서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한가인은 사극보다는 역시 현대물에 더 잘 어울리는 배우임을 입증했습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의 여운이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합니다. 1990년대의 학창시절과 풍성했던 대중문화를 경험한 X세대들에게 바치는 연가 같은 영화 '건축학 개론'은 국내 로맨스 영화 명작 리스트에 충분히 이름을 올릴 만한 작품입니다. 제작을 맡은 명필름은 2010년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이어 또 하나의 웰메이드 로맨스 영화를 탄생시켰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의 주연을 맡은 남자배우가 엄태웅이네요.

1테라바이트(TB) 대용량의 복잡다단한 감성이 지배하고 있는 요즘 시대에, 풋풋했던 '1000 메가바이트(1000MB)의 감성'을 떠올리게 해주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여운은 좀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중문화와 스포츠는 늙지 않습니다(不老). 대중문화와 스포츠를 맛깔나게 버무린 이야기들(句), 언제나 끄집어내도 풋풋한 추억들(不老句)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나루세의 不老句 http://blog.naver.com/yhj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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