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전 3점 홈런, 간염을 극복한 ‘해태 왕조’의 주역, 현역 시절 이루지 못한 고향팀에 대한 열망을 감독 취임으로 이룬 사나이. 바로 ‘해결사’ 한대화입니다.

하지만 한대화가 현역 시절 LG에 몸담았던 것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검정색 바지와 붉은색 상의로 상징되는 소위 ‘검빨 유니폼’ 해태 시절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지만 한대화는 엄연히 1994년 LG의 두 번째 우승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LG의 우승은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의 신인 3총사와 정삼흠, 김태원, 이상훈의 15승 선발 트리오, 그리고 불세출의 마무리 투수 김용수가 버텼기 때문이지만 4번 타자 한대화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대화는 1993년 12월 1일 트레이드를 통해 LG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4:2 트레이드였지만 사실상 해태 한대화와 LG 김상훈의 맞트레이드였습니다. 해태는 김상훈을 영입해 좌타자 부족을 해소하려 했고 LG는 한대화를 통해 우타 거포 기근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미스터 LG’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잘생긴 외모와 늘씬한 체구가 돋보인 프랜차이즈 스타 김상훈을 해태로 이적시키는 것에 대한 LG팬들의 불만이 폭발해 LG 구단 사무실에 항의전화가 빗발칠 정도로 충격적인 초대형 트레이드였습니다.

하지만 1994시즌이 개막된 뒤 한대화는 고비마다 적시타를 터뜨려 팀을 승리로 이끌며 LG맨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유지현이 1번, 김재현이 2번, 서용빈이 3번 타자로 출장해 출루하면 4번 타자 한대화가 1회부터 타점을 쓸어 담는 것이 LG의 득점 공식이었습니다. 너무나 손쉽게 점수를 뽑아내며 승승장구해 페넌트레이스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1994년의 LG에 매료되어 암흑기인 현재도 여전히 LG를 버리지 못하는 팬들의 숫자는 상당합니다.

사실 1994년 한대화의 기록을 살펴보면 거포와는 거리가 멉니다. 1991년부터 2년 연속 20홈런을 넘겼으나 1993년에는 13개로 줄었으며 LG로 트레이드된 첫해인 1994년에는 10개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타점은 1993년의 46개에 비해 50% 가까이 증가한 67개를 기록했습니다. 규모가 가장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며 홈런보다는 타점에 진력해 효과를 본 것입니다.

한대화는 1996시즌 종료 후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어 1997년 은퇴했지만 20여년 가까이 지난 비교적 최근에도 LG 시절을 회고한 바 있습니다. 작년 7월 23일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올스타전에서 10회말 2사 후 이병규가 오승환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터뜨리자 1루 베이스 코치로 나선 한화 한대화 감독은 이병규와 얼싸 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한대화 감독은 자신이 LG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9번을 물려받은 이병규가 끝내기 안타를 터뜨려 감격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마도 과거 홈구장이었던 잠실야구장에서 자신을 향해 열광하던 1루 관중석의 LG팬들의 함성을 추억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올 시즌 LG 4번 타자의 중책을 맡게 된 정성훈 ⓒ연합뉴스
1994년 이후 아직 우승하지 못했으며 9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LG의 2012시즌 전망은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스토브리그 동안 투타 양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선발 로테이션조차 꾸리기 버거울 정도입니다. 따라서 타선의 분발이 요구됩니다.

LG 김기태 감독은 올 시즌 4번 타자로 정성훈을 낙점했습니다. 지난 주말 개막된 시범 경기에서도 2경기 연속 4번 타자로 출장했습니다. 정성훈의 롤 모델로는 1994년 한대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해태 출신 3루수이자 오른손잡이 4번 타자이고 홈런보다는 타점을 중시하며 타선의 짜임새를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적지 않습니다. 비록 한대화가 활약했던 1994년과 같은 압도적인 힘을 갖추지는 못한 2012년의 LG 타선이지만 중고참 정성훈이 4번 타자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야구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MBC 청룡의 푸른 유니폼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적시타와 진루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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