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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위원회에 드리는 2가지 부탁

강정훈/ 직장인

우여곡절 끝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우려를 보낸 방송통신위원회가 출범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과 업계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내고 있다.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행정기구가 개편되었고 그 조직과 인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는 정도로 다가온다.

하지만 조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방송통신위원회는 일반 시민들의 생활에 너무나도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단순하고 기본적인 2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다.

방송의 사회적 영향력은 강력하다. 웬만한 드라마 시청률인 20%의 의미는 5천 만명 인구중에 1천 만명이 한 순간 한 화면을 보고 있다는 얘기다. PD, 기자, 작가, 아나운서의 생각과 말이 1천 만 이상의 대중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파된다. 가족들은 TV를 보면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날 학교와 회사에서도 주요 대화거리는 TV에서 본 내용들이다. 문화와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통신 또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가정에 TV와 함께 초고속인터넷, 유선전화가 설치되어 있고 휴대폰은 보급률이 84%라고 할 정도로 생활 필수품이 되어 있다. 가계의 평균 통신비 지출 비율이 5%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생활 양식과 산업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증명이다.

이처럼 방송통신위원회는 남녀노소, 지역과 계층의 차이 없이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방송과 통신을 통합하여 정책을 세우고 규제하는 기구인 것이다. 그러기에 업계나 특정의 정파적 이해관계보다는 시민과 수용자 입장에서 중심을 잡아주길 바라는 것이 나의 단순하고 기본적인 첫번째 부탁이다.

두번째 부탁은 일방과 독점이 아닌 진정한 융합의 가치를 구현해달라는 것이다.

TV는 지상파 뿐만 아니라 케이블, 위성 등 수 십개 채널로 가득차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인터넷으로는 영화와 드라마를 다시보고, 외출했을 때도 휴대폰으로 뉴스와 스포츠 중계를 본다. 또 이제는 IPTV라는 게 나와서 TV를 보면서 인터넷도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정말 끝이 없고 무궁무진한 미디어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방송과 통신을 구분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미디어 콘텐츠와 그것을 담아서 이용할 수 있는 기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각자의 업계 생존논리를 주장하면서 변화하는 미디어와 기술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특정 업계가 아닌 시민, 수용자, 우리 모두의 입장으로 융합하여 바른 길을 제시하라는 게 방송통신위원회를 만든 이유일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그 기본적이고 단순한 논리를 이행하면 된다. 일방의 가치에 치우거나 특정 회사, 특정 업계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콘텐츠와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진정한 융합이 구현될 수 있도록 정책을 펴달라는 부탁을 드린다.

▲ 강정훈


방통위의 환골탈태를 기대하며

임보라/ 향린교회 부목사

원래 다 그랬어~라고 말할는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처럼 너도나도 ‘미디어’에 ‘완전히’ 기대어 사는 때가 또 어디에 있을까?

미디어를 통해 이 사회가 정말 살만한 곳이며, 모두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연일 외쳐대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매순간 맞이하며 살고 있다하더라도 ‘그랬나?’ 하면서, 뭔가에 씌운 것처럼 ‘난 행복해!’를 노래하며 감각을 마비시킬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미디어의 위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는 많은 이들을 ‘誤導(오도)’해서는 아니되며, ‘正導(정도)’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결코 바른 태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正導(정도)할 것이라고 기대하기에 미디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미디어는 ‘공공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공공성’이라고 하면 ‘공익성’과도 곧잘 혼용하여 사용하지만, 공익성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사익과도 조화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반해 공공성은 ‘익’ 즉 ‘자본’의 개념을 완전히 뺀 개념이라고 여겨진다. 즉 공공성의 개념이라고 하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공익’이라는 미명 아래, 국가-자본에 취약한 구조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려하고, 국가가 개입하다 정 안되면 ‘사익’으로 넘겨도 무방하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도 공익을 위해서란다.

사정이 이러한 마당에, 공공성을 지녀야 할 방송통신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다. 하긴, 국가인권위원회도 대통령 직속 기구화를 시도한 정부이니,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하겠다는 이야기는 대통령이 직접 방송통신에 관여하겠다는 이야기 인데-봐라. 그러니까 최측근 인사로 임명하지 않았나.-이 얘기는 아무리 그 독립성을 법으로 보장한다고 우긴다 해도, 진정성이 담긴 말이라고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좀 서글프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방송통신위원회의 구성인원 자체가 5인 위원 중 2인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그 중 1인을 위원장으로 임명해야 하고, 그나마 나머지 3인도 대통령이 소속되거나 소속되었던 정당의 교섭단체가 1인을 추천하고, 그 외 교섭 단체들이 2인을 추천한다고 ‘법’에 되어 있으니, 벌거벗은 줄 뻔히 아는데도 ‘옷이 아름답습니다’ ‘최고의 작품입니다’하며 ‘독립성이 절대 보장되겠군요’라고 해야 한다는 말인가!

최소한의 독립성-기본적인 인선조차도-도 보장받지 못하는 방송통신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방송-통신의 공공성은 이미 물 건너 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각양각색의 규제 완화책과 은근한 사유화 방안을 포함하고 있는 정부 통제안이 난무한 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조차도 흐리멍덩하게 만들어 버리게 되는 미디어의 대량생산을 하기는 싫지만 상상해보자니 가슴이 턱턱 막혀 온다.

자본과 결탁하고 정권과 결탁해온, 그 시대의 악습을 답습하고자 하는 야심을 활활 불태우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훤한데, 대안적이고도, 독립적인 미디어를 생산해 내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콘텐츠인데 이에 역행하고자 한다니 가슴이 턱턱 막힐 수밖에…….

생각해보라! 거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한 매체들이 탈규제 바람을 타고, 사유화의 순풍에 실어 약자를 배려하기는커녕 강자를 두둔하고,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24시간 노래한다고 치면, 한미 FTA의 진실은 누가 얘기해 줄 수 있으며, 양극화로 치닫는 가운데 끊임없이 내몰리고 있는 민중들의 아픔은 누가 밝혀줄 것이며, 치솟는 등록금 인상으로 인해 공부하고 싶어도 정말 돈이 없어 할 수 없는 88만원 세대의 울분은 누가 대변해준다는 말인가!

미디어가 특정한 계급의 이익만을 대변해주고, 시장만능주의를 아무 가책 없이 부추기며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에 급급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깊이를 추구하기 보다는 말초적이고도 근시안적인 자극만을 왕창 주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 그 미디어는 없는 것이 아예 낫다.

바라기는, 여전히 많은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는 방통위가 정말 뭔가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바보를 양산해내는 데 최전선에 서있는 미디어가 아닌, 그 위력에 걸맞게 건강한 사회성을 키워내고, 깊이 있는 문화를 키워내기 위해 환골탈태하는 노력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들여다보고 있느니 없는 게 차라리 낫다며, 과감히 TV를 집 밖으로 내버리고, 신문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며 덮어두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물론,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의존하는 걸! 하면서 메롱~하는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하는 수 없다.

나도 ‘메롱~’하면서 방통위 앞에서 진실을 까발리는 행위를 하는 수밖에.

▲ 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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