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1925년 미국 몬타나,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는 필(베너딕트 컴버배치)은 막대한 재력은 물론 위압적이고 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 그의 동생 조지(제시 플리먼스)가 로즈(키얼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을 가족으로 맞이하고, 동생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분노한 필은 로즈의 아들을 볼모로 삼아 그녀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목만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감이 오지 않는 <파워 오브 도그> 소개 문구다. 키워드는 마지막 문장이다. ‘자신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라니.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문장임을 알 수 있다. 자신(=필)이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지 생략되어 있다. 목적어가 빠져있는 엉성한 끝맺음이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는 몰입과 주제의 심화를 위한 최선의 마무리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파워 오브 도그>는 필이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를 밝혀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스틸 이미지

로즈는 필과 다른 듯 같다

바로 앞 문장에 등장하는 로즈가 첫 번째 용의 선상에 오른다. 로즈는 마침 주요인물 중 유일하게 여성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질 수 있다’라는 문장은 자연스레 제부인 로즈와의 관계를 의심케 한다. 게다가 극 중에서는 조지가 로즈를 위해 그랜드 피아노를 마련하는 장면이 비중 있게 다뤄진다(원작에 있는 내용이라고 한다). 유부녀인 에이다(홀리 헌터)가 남편 스튜어트(샘 닐)를 두고 베인스(하비 케이틀)과 위태로운 사랑에 빠지는 제인 캠피온 감독의 대표작 <피아노>를 본 관객이라면 덥석 물 수밖에 없는 떡밥이다.

그러나 2020년대의 <파워 오브 도그>는 1990년대의 <피아노>가 아니다. 에이다를 방치했던 스튜어트와 달리 로즈의 남편 조지는 지속해서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남편이다. 묘한 애증이 오갔던 에이다와 베인스와도 다르다. 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로즈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 필의 정신적 학대에 못 이긴 로즈는 탈출의 방편으로 술을 택하고 결국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된다. 감독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것처럼 노련하게 트릭들을 활용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필은 로즈를 ‘꽃뱀’이라고 부른다.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위해 조지와 결혼했다며 맹비난한다.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장남의 과잉대응처럼 보이지만 잘 뜯어보면 조지를 사이에 둔 연적처럼 보인다. 꽃뱀의 가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필이 조지에게 받아야 할 관심과 애정을 로즈가 독차지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필의 성별을 바꿔서 상상한다면 이해는 더 쉽다.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며느리를 못살게 구는 흔한 고부갈등의 양상이 보이는 탓이다. 두 사람은 후에 로즈의 아들을 두고도 신경전을 벌인다. 이때도 로즈는 필과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싸움은 멈추지 않는다.

심층적으로 파고들어도 두 사람은 ‘도태되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한다. 정신적 학대로 필 앞에서는 첫 소절조차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지만, 로즈는 원래 무성영화의 오케스트라 반주를 하던 피아니스트였다.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되며 직업을 잃고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며 홀로 아들을 키우게 된다. 환경변화에 주도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순응하거나 도피하는 로즈의 태도는 필과의 갈등 상황에서 술로 도망가고 마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필도 도태 인간이긴 마찬가지다. 마을에 기차가 들어오고 자가용이 보급되는 와중에도 교통수단으로 오로지 말을 이용하고 불편해 보이는 카우보이의 전통복장만 입는다.

도태되는 이들의 운명을 가른 건 한순간이다. 착실히 알코올중독의 길을 걷던 로즈는 딱 한 번 제대로 환경을 거스른다. 그가 애지중지 보관하던 소가죽을 인디언들에게 무상으로 넘겨버린 반항으로 로즈는 자유를 쟁취한다. 반면 필은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다. 동물의 사체에는 손대지 말라며 동생에게 경고할 줄은 알지만, 자신을 카우보이로 키워준 브롱코 헨리의 유산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산다. 그리고 필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죽은 사람이 남긴 추억이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스틸 이미지

조지는 필과 다르다

로즈와 앙숙이 되는 원인 제공자 조지가 필의 사랑이 향하는 곳일까. 감독은 이 역시 아니라고 말한다. 대저택에 살고 있지만, 필은 다 큰 성인인 조지와 트윈침대를 쓰고,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초조해한다. 로즈와 결혼하겠다는 조지의 결정도 존중하지 않고 부모님께 편지까지 쓰며 격하게 반대하고 조지와 로즈의 결혼 이후에도 그는 굳이 옆방을 쓰며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이질적 존재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부드러운 말투와 품위 있는 매너를 갖춘 신사다. 개인위생도 청결히 유지하고 말 대신 자동차를 애용한다. 카우보이보다 근대적 사업가의 면모를 보인다. 길쭉하고 날렵한 형과 달리 조지는 동글동글한 인상이지만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의지를 관철하는 데는 두려움이 없다. 자신의 감정에도 진실하고 꾸밈없는 단단한 사람이 조지다.

필은 감정에 진실하지 못하고 애정을 그릇된 방식으로밖에 표현 못 하는 인물이다. 조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지만 ‘뚱보’라고 부르며 모두 앞에서 면박을 준다. 터프하다고 표현하기에는 한참 선을 넘어 무례하고 과격한 카우보이들의 대장. 집에서 씻은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지저분하고 야만적인 인물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동생과 달리 필은 예일대에서 고전학을 전공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다. 시장 같은 정치인들과도 유려하게 대화를 이끌 유머감각도 겸비했고 작은 기타인 벤조를 유창하게 다루는 음악적 재능까지 선보인다.

형제의 결정적 차이는 성적 지향에서 드러난다. 필이 조지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크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조차 그를 뚱보라고 부르며 위악적으로 행동하는 건 사회적으로 지탄받지 않고 지향을 드러낼 수 있는 동생이 부러워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지가 형의 성적 지향을 파악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 짐작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의 투정을 받아주는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 또한 쉽게 거두기는 어렵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스틸 이미지

피터는 같은 듯 다르다

로즈도 조지도 아니라면 필의 사랑이 향할 곳은 어디인가. 마지막 문장의 바로 앞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로즈의 아들을 볼모로 삼아’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 바로 로즈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가 필이 발견한 사랑의 종착역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피터는 필보다 더 길쭉하고 여리여리한 몸매를 선보이고, 핏기없이 하얀 얼굴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흰색 운동화를 즐겨 신는 조금은 독특한 사람이다.

필과 피터의 첫 만남은 유쾌하지 않았다. 로즈의 식당에 온 필은 식탁에 놓인 종이 장미를 본다. 물론 피터의 작품이다. 필은 종이 장미로 담뱃불을 붙이고 피터를 ‘낸시양’이라고 놀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필은 이때부터 투박한 카우보이들과 달리 종이 장미를 만들 수 있는 섬세한 피터를 눈여겨봤는지 모른다. 확신을 준 건 브롱크 헨리와 자신만 보았다는 개의 형상을 피터가 산맥에서 발견했을 때다. 유약하게 생기고 카우보이들과 다른 옷을 입는다는 선입견으로 성적 지향도 다를 거라 생각한 건 필의 오판이었다.

피터는 우연히 강가에 있는 필의 아지트를 발견한다. 그곳에는 필은 브롱크 헨리의 나체가 담긴 화보가 잔뜩 쌓여있고 필은 꽁꽁 싸맸던 옷을 홀딱 벗은 채 수영을 하다가 B.H.라는 자수가 박힌 손수건으로 수음을 한다. 이 장면을 들킨 필은 피터를 죽어라 쫓아가지만, 이상하게 화해의 제스쳐를 취한다. 로즈를 더 미치게 만들어 조지와 떼어놓으려는 속셈도 있겠지만 앞선 선입견과 오판이 헨리와의 추억을 재현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 오해를 발판 삼아 피터가 접근한다. 헨리와 밤새 엘크 사냥을 하고 침낭에 누웠다는 말에 둘이 옷을 벗고 있었냐고 당돌하게 묻기도 한다.

필은 피터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두 사람은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부터 다르다. 필은 이야기한다. 브롱코 헨리가 말하길 불행을 견디며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1920년대 미국에서 용납되지 않는 성적 지향을 가진 그가 불행을 견디기 위해 택한 방법은 사회적 혐오에 편승하고 자신을 숨기는 방식이었다. 필은 농장의 누구보다 마초처럼 행동했다. 여성, 인디언, 유대인을 비롯한 약자들을 험하게 대하며 무차별 혐오를 퍼부었다. 그러나 가슴 한쪽에 자리잡은 사랑을 떨쳐낼 수도 없었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채울 수 없는 공허다.

반면 피터는 장애물을 없애 가는 게 인생이라고 죽은 아버지에게 배웠다. ‘낸시양’이라는 필의 조롱에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도 훌라후프를 돌리는 것으로 분을 삭이며 훗날을 도모하고, 엄마의 간곡한 부탁에도 실습을 위해 토끼를 해부하는 모습,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아주 쌀쌀맞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필에게 고백하는 에피소드까지. 사회가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이 어떤지 알고 있으면서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멘탈의 소유자라는 피터의 특성이 튀지 않지만 유려하고 설득력 있게 이어진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스틸 이미지

진짜 서부의 사내는 누구인가

우연일까 필연일까. 술에 취한 로즈가 인디언에게 필의 소가죽을 모두 넘겨주고, 최초이자 최후의 반항을 한 날. 필은 피터에게 밧줄을 만들어줄 재료가 없어서 전전긍긍한다. 때마침 피터는 필에게 자신이 가진 소가죽이 있다고 말한다. 피터가 혼자 말을 타고 나갔다가 발견한 소의 사체에서 떼어낸 가죽으로 탄저균이 득실거린다. 마침 얼마 전 맨손으로 소를 거세하다가 손에 상처를 입은 필은 피터의 호의를 받아들여 밤새 공들여 밧줄을 만든다. 마치 밧줄처럼 두 사람의 유대를 튼튼하게 이어주리라 믿듯이.

며칠 후. 몸이 좋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필에게 조지가 병원에 다녀오자고 말한다. 평소의 카우보이 복장이 아닌 정장을 입고 집을 나서려던 필은 완성된 밧줄을 건네주기 위해 피터를 찾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조지의 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 필의 장례식이 진행 중이다. 결국 필은 사랑의 종착역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렇게 사건이 마무리된 후, 오프닝을 열었던 정체 모를 남성의 내레이션이 결국 모든 이야기의 압축임을 알게 된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난 엄마가 행복하기만 바랐다. 엄마를 돕지 않으면 난 사내도 아니지. 엄마를 구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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