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누리당 김종인 비대위원이 28일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정책분과위원회에서 정홍원 공심위원장의 1차 공천발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지지율이 역전된 이유는 민주통합당의 공천 파행과 야권연대의 난항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누리당이 뭔가 쇄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누리당의 혁신의 중심엔 비상대책위원회가 있고 중심에 김종인이 있다. 김종인은 <시사IN>에서 이명박 정부를 줄곧 비판했던 보수적 법학자 이상돈, 전여옥을 변절자로 치부한 젊은 이준석과 함께 박근혜 비대위의 쇄신 아이콘이다. 1987년 헌법이 제정될 때 속칭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불리는 119조 2항을 만드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새누리당 강령에 경제민주화를 삽입시키는 등 맹활약을 하고 있다.

김종인은 그동안 두 번이나 사의를 표명했다가 박근혜의 만류를 받고 번복했다. 특히 이번 사의표명은 이재오가 공천명단에 포함된 것에 항의한 것으로 지난번 것보다 더욱 직접적이었다.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사의하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김종인의 가벼운 처신을 비판하고 조선일보 사설이 이재오와 김종인 사이에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상황에서 김종인이 새누리당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새누리당이 쇄신과 화합의 두 마리 토끼를 아슬아슬하게나마 모두 잡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김종인표 쇄신은 어떤 의미일까?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 그리고 진보신당 지지자들은 김종인표 쇄신이 실제로 한국 사회의 개혁을 추동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김종인이 결국 이재오를 잘라내지 못했단 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절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 일리는 있지만 이재오 한 사람을 남겼다는 것이 개혁을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아니면 김종인이 재벌 개혁엔 찬성하지만 한미FTA 반대를 당론으로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김종인표 쇄신으로 만들어지는 새누리당이 개혁을 수행하기 난망한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민주화란 말이 굉장히 두루뭉술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평소에 새누리당을 제재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임기 초 시늉만하다가 다음 선거를 위한 쇼가 필요해질 때까지 몰라라 해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 119조 2항에 ‘경제민주화’를 명시한 것은 시대를 내다본 혜안이었다. 이것 때문에 정부가 어지간한 수준의 규제정책을 만들어도 재벌기업이나 전경련이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는 지금껏 정부가 ‘경제기득권’ 세력에게 위헌소송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정책을 편 적이 없다는 거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민주화 조항이 보장하는 정부의 권리를 활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건데, 이 경우 그러한 정책을 경제민주화란 이름으로 표현하는 게 적절한지는 또 다른 문제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스스로 야당의 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해 “정부가 응당해야 할 규제를 내놓으면서 경제민주화라 말한다”고 일침을 놓은바 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응당 해야 할 규제’이며 어디부터가 ‘경제민주화’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한 규제인지 모호하다. 민주화란 말이 통용되는 정치영역의 기본원리는 1인 1표이지만,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는 작동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경제영역에서 민주화를 구현한다고 말하려면 노동자의 기업경영권 참여나 소비자 권리의 획기적인 증대 등 보유한 금전과 상관없이 개개인의 권리를 강하게 관철시킬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에서 나오는 ‘경제민주화’ 정책 중에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재벌개혁 혹은 재벌규제 확대, 양극화 해소 혹은 분배정의 실현 정도의 용어로 충분할 정책들을 경제민주화라 호명하기 시작하면 별 것 아닌 정책으로도 엄청난 혁신을 꾀하고 있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다른 나라의 기준에선 시장경제의 룰을 바로세우는 정도의 작업에 경제민주화와 같은 수사를 붙이는 것은 개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두 번째 문제다. 사실 우리 사회의 정치세력은 경제민주화 정도가 아니라 양극화 해소에도, 하다못해 재벌개혁에도 명운을 걸 의사가 별로 없다. 선거 직전에야 정치를 규정하는 1인 1표의 원리를 따라 다수에게 도움이 될 정책을 내걸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서부터는 1원 1표의 원리를 따내려는 시장경제의 가진 자들이 그들을 포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세력에게 개혁을 강제하려면 이해관계가 다양한 시민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화 되어 있어,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정치세력에 요구하고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엔 지지를 철회하여 그들의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복지국가 담론의 번성에 대한 정치학자 최장집의 일침을 끌어들인다면, 정책의 ‘산출(Output)’에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되고 ‘인출(Input)'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면 이것이 새누리당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민주통합당은 한국노총과 정책연대를 하고 있고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의 노조조직률은 10% 이하로 내려가 있어 전체노동자를 대변한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전체 노동인구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영세자영업자들은 이런 단체들과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어 장사가 잘 되길 바라려면 억지로라도 경기부양을 꾀하겠다고 말하는 정치인을 지지해야 할 판이다.

이런 실정에서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착한 정치인’이 나타나서 ‘착한 정치’를 펼치기를 희망하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람들이 정치인의 인성·품성·진정성에 유달리 집착하는 건 구조적 문제를 모르는 멍청한 이들이라서가 아니라, 실상은 그들의 처지가 그런 것에 집착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 아무리 나서서 ‘착한 이명박’을 찾지 말라 일갈한들 무소용인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2017년까지 노조조직률을 20%, 단체협약 적용률을 50%로 끌어올리겠다는 통합진보당의 총선 정책은 문제의 핵심을 짚었고, 하나의 구호로 사태를 재단하기보다 단계적인 해법을 제시했단 점에서 현실성 있다.

그러나 이 해법에서도 여전히 배제된 1/3의 영세자영업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해법을 꾸준히 지지해줄 것을 어떻게 부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우리는 새누리당을 뒤흔드는 김종인의 이면에 어떠한 무능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 무능이 김종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우리 정치의 무능임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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