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 사장 귀하

분노한 직원들에게 내밀려 채 추위가 가시지 않은 겨울
어디서 이 편지를 보시게 될지 근황이 무척 궁금합니다.
어떤 심정으로 지낼지 대충 짐작가지 않은 바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편지만은 꼭 차분히 한번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쓰려고 포탈에서 당신 이름을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아주 흥미로운 정보가 하나 떠오르더군요.
‘웨일즈대학교 매스커뮤니케션 석사’이시더군요.
영국 전통의 명문 대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더 큰 관심을 끈 건 김사장의 전공 분야였습니다.
저랑 대학원에서 공부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김 사장께서는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왔습니까?
저널리즘에 관해서도 차분히 다시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오랜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저는 그랬답니다.
저널리즘에 관한 수업들이 특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었습니다.
80년대 한국의 지독히 엄혹했던 시절과 대비되고
야만적인 자유언론 탄압의 현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겠죠.

아무튼 그때 새겨들은 저널리즘 관련 몇 가지 지식들이
지금까지도 남아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서나
나름대로 미디어 문화 언론 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나
이런 잡글을 쓰는 데 있어 항상 기본이 되고 도움이 된답니다.

김 사장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레슨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진실을 추구하지 않은 저널리즘, 즉 표피적 리포팅은 악이다.
진실 채취의 작업을 위해 저널리즘은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저널리스트들은 권력을 제대로 감시하고 사회를 보호할 수 있다.

오직 그러한 역할을 다할 때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럴 때 비로소 민주정치를 반역하지 않는 선한 집단으로 평가되며
그렇듯 저널리스트들에게는 사회적으로 특수한 공적 책무가 부가되기에
좋은 저널리스트를 길러내는 게 곧 바른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어떻습니까? 김사장께서도 이렇게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굳이 해외에 나가 공부 안 해도 자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런 이야기는 국내외 상관없이, 이념과 무관하게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자 저널리스트의 기초 상식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김사장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현장에서 오랫동안 기자로 뛰어보니 안 그렇던가요?
저런 배움은 대체 현실에서는 안 통할 헛헛한 공론에 불과하던가요?
붕당정치와 권모술수가 판치는 대한민국에서 저널리즘론은 통하지 않던가요?

사장이 되기 전에도 그랬고, 사장이 되고 나서도 항상 그렇던가요?
진실이고 뭐고, 결국 중요한 건 권력의 뜻이자 그 주변에 깔린 망이던가요?
그래서 낙하산으로 파견되든, 아니면 김사장처럼 조인트를 까이든
그 권력에 봉사하는 게 개인적으로 살아날 유일한 길이던가요?

김재철 사장

그게 한국 현실에서 체득한 보도론이고 기자학입니까?
권력의 지시와 윗선의 의중에 반하는 뉴스는 만들지 말고
권력의 진로를 위반하는 여론에 귀 기울이는 프로그램을 편성치 말며
진실을 위해 권력을 불편케 하는 저널리스트들은 철저하게 통제하고 제압할 것?

그렇듯 권력의 주변, 그 아래를 기회주의적으로 쫒던 선배들을 닮아
공영방송 MBC, 그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이렇게 철저히 구축해버린 겁니까?
MBC를 혐오스러운 저질 보도의 쓰레기장으로,
후진 뉴스, 빗나간 프로그램의 스테이션으로 만들어버린 겁니까?

능력 있는 기자와 의식 갖춘 피디들을 목 자르고 좌천시키고
시청자가 신뢰해 온 드문 저널리즘 프로그램은 완전 무력화시키고는
그렇게 해서 MBC를 온통 조롱과 불신의 치욕으로 빠트린 게
그게 바로 김사장께서 근래에 들어 한 업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 회의와 무력의 비굴을 더 이상 참지 않고 떨쳐내겠다고 일어나선 게
불량 뉴스와 거짓 보도의 역사를 반성하고 깊이 시청자께 사죄하겠다는 게
그래서 저널리즘이 가능한 공영방송을 다시 함께 만들어보자는 게
그게 바로 지금 서울 MBC 구성원들이 파업에 나선 동기지 않습니까?

저널리즘을 복구하겠다는 용기 있는 저널리스트들의 봉기
함께 해 공영방송과 민주정치를 보수하리라는 안팎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
그 단호한 선택과 분명한 결기에 내놓는 ‘불법’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을 허튼 선동에 불과합니다.

김재철 사장

이 사회를 폭력의 공포로 몰아넣던 파시즘의 장난은 처참히 끝났습니다.
무소불위 뉴라이트 공화국에 남은 것은 끔찍한 자기 고발의 미래뿐입니다.
이제 사장이 할 일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간파하고 더 이상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역사의 운명, 추상같은 시대의 명령을 겸손히 따르시죠.
회사 주변을 괜히 떠도시지 말고, 상황이 호전될까 눈치 보지 말고
냉정하게 자신이 한 게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깊이 통회해 보면
당신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 양심의 판단은 바로 다가올 겁니다.

시대가 저널리스트들의 석방과 저널리즘의 해금을 요구하는데
시청자들이 공영방송 MBC의 더욱 처절한 반성과 사죄를 바라는데
온 사회가 MBC 저널리스트들의 실천을 당장 명령하고 있는데
이런 결정적 시간에 당신이 택할 현명한 결정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 전규찬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미디어스
파업 장기화에 대비한 시간제, 기간제 기자 선발이니 하는
그런 계약직 비정규직 창출의 꼼수는 당장 철회하십시오.
지금 필요한 것은 ‘전문기자’니 하는 그런 작자들이 아님도 명심하십시오.
MBC 기자, 피디들이 당장 저널리스트로 일할 수 있도록 하면 되오.

편지가 좀 길었습니다. 그래도 시중의 메시지는 꼭 분명히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서둘러 잘 정리하십시오. <대학>에 ‘수신제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회사 바깥 어디서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차분히 마음을 닦고 바른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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