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은 퓨전사극이자 트렌디 사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젊은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몇 가지 문제점들이 없지 않은데, 왕을 비롯해서 젊은 배우들을 클로즈업할 때 보이는 피어싱 자국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을 보고 흔히 가리지 못한 옥에 티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품과 달리 몸에 난 자국은 달리 가릴 길이 없으니 만일 옥에 티라면 불가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확히 연대가 정해지지 않은 해품달 속 피어싱 자국은 옥에 티가 아닐 수 있다. 이에 대해서 2011년 2월에 방영된 KBS 역사 스페셜이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역사 스페셜은 조선 이전부터 전해졌던 남자들의 귀고리 풍속을 자세히 소개했다. 역사 스페셜의 자료들을 보자면, 적어도 조선 초까지 남자들 특히 귄세가들은 모두 귀고리를 했다. 자연히 귀고리의 크기와 모양은 신분과 부를 자랑하기 위해 점점 커지고 화려해졌을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랜 풍습이었던 남자의 귀고리 착용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역시나 성리학과 사대주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충과 효를 국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효의 시작은 신체발부 불감훼손이기에 귀를 뚫는 것은 오랑캐의 풍습이라 하여 금지하게 된 것이다. 선조 때에 이르러 귀를 뚫는 것이 금지되자 자연스럽게 귀고리도 착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종 때 금과 은의 낭비를 금지하는 교서에는 사대부의 귀고리를 예외로 둘 정도로 보호받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중족실록을 보면 양평군 사칭 사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 기록에는 "양평군의 나이 9세, 큰 진주 귀고리를 달았으니..." 라며 귓볼의 큰 구멍 여부를 통해서 양평군을 구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남자들의 귀고리 착용이 당연함은 물론 신분고하에 따라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와중에도 한국 남자들의 귀고리 풍습을 뒷받침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 30년(1597) 명나라 사신 접반사 이덕형이 경리 양호와 나눈 이야기 속에서 “근자에 조선군대가 군공(軍功)을 다투는 과정에서 함부로 조선사람을 죽여 거짓으로 왜적인 양 꾸미는 일이 있다”는 추궁을 받았다. 이에 이덕형이 “가짜왜적이라면 좌우의 귀를 살펴보아 귀고리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으면 알 수 있다”고 라고 해결책을 쉽게 제시했다.

이렇듯 조선의 남자들은 당당히 귀고리를 하고 살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해품달의 시대를 조선초기로 설정하자면 옥에 티는 피어싱 자국이 아니라 귀고리를 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엄격히 따지자고 들자면 옥에 티가 된다. 해품달의 년대가 최소한 조선 초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로 잔실이가 월이에게 한글로 된 편지를 능숙하게 써 보낸 장면이 나오는데, 일개 무녀가 그렇게 한글을 잘 쓰게 될 정도라면 적어도 선조 이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해품달에는 간혹 현대의 유행어들이나 미국 드라마 같은 상황들이 끼어든다. 이 같은 패러디들이 아무리 퓨전사극이라도 사극에 채용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그렇게 딱히 큰 재미도 주지 못하는 어설픈 패러디보다는 차라리 꽃미남 왕에게 귀고리를 채워서 소위 정통사극들이 피해갔던 디테일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된다. 그랬다면 퓨전사극이 오히려 고증에 앞서는 역설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