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끼는 이들은 모두 나로 인해 위험해진다. 난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통함조차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전하 탓이 아니옵니다'

늦은 밤, 조선의 왕 이훤과 무녀 월이 나누는 대화는,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뿌리깊은나무'의 대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합니다. 당시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자신의 측근이 계속해서 죽어나가자 세종(한석규 분)이 비슷한 말을 했고, 이를 지켜보던 소이(신세경) 역시 월과 똑같은 말로 받은 바 있습니다.

만인지상이자 조선 모든 것의 주인인 왕은 의외로 무력한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렸던 조선 후기의 왕들뿐 아니라, 조선의 상당수 왕들이 비슷한 심정이었을텐데요, 조선의 국가체제가 왕권의 일인 독재를 견제하는 시스템이었기에 조선의 왕들은 대체로 비슷한 무력감을 호소하곤 했습니다.

허구 속 조선의 왕인 이훤 역시 권세 높은 외척들에 둘러싸인 채 이러한 무력감에서 자유롭지 못한데요, 이에 못지않게 피곤한 왕의 일상도 엿보입니다. 바로 극악의 합방절차였지요.
미령한 건강을 핑계로 중전과의 합방을 단호히 거부하는 이훤에게, 영의정이 거래를 제안하지요, 액받이 무녀(월: 한가인)가 수일동안 왕의 침전을 지켰음에도 옥체에 효험이 없다면, 소임을 다하지 못한 무녀는 국가의 보안과 안전을 위해 제거돼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결국 월을 보호하고자 중전과의 합방을 받아들이는 이훤인데요, 그 합방 절차는 가혹할 정도로 치밀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이훤은 합방을 앞두고 침도 맞고, 약도 먹고, 의관도 정갈히 챙겨입어야 했지요. 이 과정에서 드러난 왕의 굵은 다리털을 보고 있자면 그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텐데요, 왕이 언젠가 중전에게 했던 말 '그대의 가문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나 그대는 결코 나의 마음을 얻진 못할 것'이라던 필생의 다짐을 여전히 곱씹는 이훤에겐 이러한 절차가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을 법합니다. 이러한 왕의 심경은 장엄한 배경음악과 무표정한 왕의 얼굴을 통해 충분히 전해지지요.

기록을 보면, 왕과 중전의 합방은 국가의 대사로서 방 밖에서 상궁들이 대기하는 가운데 치뤄진다고 합니다. 옷고름을 푸는 행위 하나 머리를 두는 방향조차 밖에서 지켜보는 상궁의 지시에 따라 진행됐다고 하니 그 수치심과 피곤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겠지요, 입실시간은 자정이고 관계는 새벽에 절정을 보라니 이 또한 곤혹일 것이며 행여 눈이 오거나 번개라도 치면 합방절차가 중단되기도 했으니, 중전과의 합방을 마냥 좋아했을 조선의 왕은 드물었을 겁니다. 조선의 왕들이 이런 이유로 중궁전보다 후궁전을 더욱 찾았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신빙성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이훤이 중전의 처소에 들자 입구에선 상궁이 산 닭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는 혹여 합방 과정에서 왕의 옥체에 이상이 생기면 닭의 생피를 마시게 하려는 목적이지요. 이제 왕이 중전과 대면하자, 방 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전하께옵선 입성관을 내려놓으소서' '전하께옵선 옥대를 푸소서' 행동 하나하나를 지시하는 해품달 속 왕의 합방은 조선의 왕이 수행해야만 했던 '합방업무'의 절차가 잘 드러나 있지요. 이야기는 허구이나 그 속엔 조선의 왕들이 겪었던 피곤한 삶이 고스란히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훤은 이러한 절차에 파격을 가합니다. 풀라는 옥대는 냅두고 중전에게 냉소를 날리지요, 마음을 정갈히 하는 것도 합방의 중요한 의무이건만 두 사람 사이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는 가운데, 이훤은 갑자기 중전을 과격하게 끌어안습니다.

평생 절대 쳐다보지 않겠다 다짐했던 중전이건만 '월'의 안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이훤은 패배감과 무력감에 잠기는 대신 전통과 절차의 파괴로 위안을 얻습니다.

'좋소, 중전을 위해 내가, 옷고름 한번 풀지' 원래 말 안 듣는 남자가 매력적이긴 합니다.

연예블로그 (http://willism.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사람속에서 살지만, 더불어 소통하고 있는지 늘 의심스러웠다. 당장 배우자와도 그러했는지 반성한다. 그래서 시작한 블로그다. 모두 쉽게 접하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소통을 시작으로 더 넓은 소통을 할 수 있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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