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언론매체들이 ‘비키니 시위’ 논란이라 부르고, 이에 항의하는 ‘여초’(여성회원이 더 많은) 커뮤니티들이 성명서를 통해 ‘코피 사건’으로 재정의한 나꼼수 논쟁이 식을 줄 모른다. 이 논쟁에는 흥미로운 두 가지 지점이 있다. 하나는 논쟁하는 양측이 자신의 감각이 상대방 보다 ‘첨단’임을 주장하려 든다는 것이다. 가령 나꼼수의 지지자들은 비판자들이 고루한 도덕주의에 갇혀 있거나, ‘옛날 버전’의 페미니즘의 문제제기를 답습하고 있다고 본다. 김어준도 문제제기하는 이들이 ‘60년대’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지자들도 상대방이 서구의 성해방 담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여러 가지 사례들을 끌어온다.

한편 나꼼수의 비판자들은 나꼼수 및 그 지지자들이 ‘운동권’들도 20년 전 쯤에 벗어던진 후져빠진 성인지 감수성에 머무르고 있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 말하고 있다. 감각의 문제는 사실 논리로만 따지기가 어려운데 그들은 서로 대화를 하기 보다 “내 감각이 얼마나 선진국의 (혹은 선진국 진보의) 그것에 가까운가”를 논증(?)하려 애를 쓰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 사회 대부분의 정치토론이 관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부질없는 메아리로 끝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흥미로운 또 다른 부분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감각의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나꼼수 코피 사건’에 대한 관전 포인트는 ‘기존 진보’와 ‘나꼼수식 진보’의 대립이며 페미니즘과 마초이즘의 대립, (이건 언론문제에 관심 많은 ‘덕후’들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이긴 하지만)경향신문과 한겨레의 대립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이 문제를 판단내릴 기준이 있다고 자처하는 것 같다. 옹호자들은 진보세력과 페미니스트들이 ‘비키니 시위’의 당사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옹호자든 비판자든 실제로 나꼼수의 청취자들이 이 사건을 어떤 ‘감각’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옹호자들은 나꼼수 청취자들 대부분이 이 사건을 ‘즐겼다’란 사실을 전제로 했고, 비판자들 역시 그 부분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윤리 기준 중 어느 쪽이 ‘첨단’에 가까운 갑론을박할 때 생각지도 못했던 삼국카페(소울드레서, 쌍화차 코코아, 화장발 세 카페를 일컫는 말. 각각 의류, 성형, 화장이라는 여성들의 관심사를 대변하는 커뮤니티이다. 대표적인 ‘여초’ 커뮤니티이면서 2008년 촛불시위를 주도한 주체들 중 하나로 평가를 받았다)의 성명서가 도달했다. 이 상황 역시 사건을 다루는 우리의 방식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기력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글은 미디어스 2월 5일자에 실린 정희준 선생(이하 존칭생략)의 <정녕, '나꼼수'를 무릎 꿇리려는 것인가?>와 경향신문 2월 7일자에 게재된 같은 필자의 <자아비판 강요하는 진보>에 대한 반론의 형식을 취한다. SNS 세상에 널리 회자된 것은 후자이지만, 사실 후자의 논지는 전자의 일부에 해당하기 때문에 미디어스 기고문을 중심으로 반박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의도는 이 긴 서론에서 암시되었다시피 단지 정희준의 논리가 잘못되었단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장(그리고 다른 많은 주장들)이 드러내지 못하는 이 논란의 다른 부분을 ‘보여주는’ 데 있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이상한 관념

“자고로 다양한 인간군상의 인생살이를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며 집단적 ‘바른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보수의 덕목이다. 진보는 그들이 사는 방식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아닌가.”

정희준의 모든 주장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위와 같은 단언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너무나도 해괴해서 반박의 대상이기보다는 해체의 대상이다.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은 한 번도 마음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 법이든 관습이든 간에 사람은 스스로 만들어낸 ‘규제’를 받아들여야 했다. 여기서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규제’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1) 그것을 누가 만드는지와 2)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였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규제를 누가 만드는지의 문제에 관해 되도록 여러 사람이 참여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타당성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략적으로라도 동의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내용’의 문제다.

정희준은 이 ‘내용’의 문제를 획일성과 다양성의 문제로 치환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의 정규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김일성, 박정희, 전두환이 그립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체로 다양성을 옹호한다. 여기서 정희준은 ‘규제’를 획일성의 편에 위치시키고, ‘자유’를 다양성의 편에 위치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규제가 많으면 획일성을 옹호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규제를 되도록 줄이는 자유를 옹호해야 한다는 식이다. 물론 규제가 너무 많으면 획일성을 옹호하는 사회가 탄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인들에겐 공간적으로도 몇 백km이고 시간적으로도 불과 수십 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경험이기에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정희준은 그 경험적 근거를 무기삼아 야바위를 친다. “이대로 가면 북한이나 독재가 된다!!” 그래서 진보는 반대방향으로 굴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변은 해체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 자주 쓰는 것이다.이 문장에 쓰인 ‘진보’와 ‘보수’는 그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책을 조금이라도 읽은 이들에겐 너무나도 이상하여 그 위치를 바꾸고 싶은 충동이 들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진보를 “인생살이를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며 ‘집단적 바른 생활’을 요구”하는 종자들로 보고 싶어 한다. 그들은 내가 정희준의 논변을 풀어서 쓴 것과 비슷한 얘기를, 정확히 ‘보수’와 ‘진보’를 바꾸어서 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손’에 많은 것을 맡기는 그것이 ‘규제 없는 자연스러운 세상’이란 그들의 이념에 가장 합치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희준이 얼마나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이 보수주의자의 믿음은 정희준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해체’될 수 있다. 근년에 장하준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신념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히고자 했다. 사실은 시장경제도 규제에 의해 작동하며 우리가 그 규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것은 경제영역의 문제이지만 담론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세상에서 ‘표현의 자유’를 가장 향유하는 나라가 있다면 미국일 것이다. 유럽에서는 처벌대상이 될 수 있는 인종주의적 발언 같은 것들이 미국에선 좀 더 폭넓게 허용된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미국을 더 진보적인 사회라 부르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표현의 자유’가 있기에 그런 주장도 가능은 하지만 그렇더라도 유럽을 획일성을 추구하는 전체주의 국가로 바라볼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어떤 종류의 규제가 오히려 소수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진보적인’ 정책이라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규제들이 사람들의 표현을 위축시킬 위험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계해야 하고 토론이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표현의 자유’의 문제인가?

정희준은 자신의 독특한 진보관을 토대로 ‘코피 사건 논쟁’을 결국 ‘표현의 자유’의 문제로 만든다. “그들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것은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공개적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기검열을 요구하는 동시에 양심의 자유를 위협하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참에 나꼼수 멤버들을 사상검증 하겠다는 것이다.”라며 사과를 요구하는 측을 비판한다. 경향신문 칼럼에선 헌법 조문까지 들먹이며 사과를 강요하는 이들은 ‘침묵의 자유’를 훼손함으로써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친절하게 우리가 ‘사과 강요’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방책들을 제시해준다. “누구든 비난은 물론, 보이코트나 불매운동도 할 수 있고 나꼼수 멤버들이 쓴 책을 불태울 수도 있겠다.”

이것은 사뭇 변태적인 논리다.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인류 사회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저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보단 저자의 책을 불태우는 것을 거센 항의라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불태우는 것이 그렇게 온건한 퍼포먼스라고는 볼 수 없다. 과거 안티조선 운동의 초창기에 일군의 이문열 독자들이 ‘이문열 책 반납’ 운동을 벌이는 와중에 일부가 ‘책 화형’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분서갱유’를 연상시키는 심각한 폭력으로 많은 문인들에게 각인되었다. 독자는 국가기관이 아닌지라 사과를 요구하더라도 저자가 거부하면 그만이지만, 책을 불태우는 일만큼은 말릴 도리도 없이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책도 다시 찍어내면 그만이니 이 시위를 통해 현실적으로 발언권이 말소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시위야말로 시위참여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권력을 잡으면 너같은 놈은 말할 권리도 없을 거다.”란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아마 이런 시위를 비판할 때에도, 헌법조문을 들먹이며 헌법상 권리를 운운한다면 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다. 당사자들이 이미 ‘침묵의 자유’를 충분히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정희준의 ‘사상검증’ 운운이 얼마나 웃긴 얘기인지를 알 수 있다. 보이코트, 달걀 투척, 불매운동, 책 화형식까지 용인하겠다면서 ‘사과요구’만을 위헌적으로 바라보려는 정희준의 욕망은 논변이 아니라 생떼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 말로 나꼼수 멤버들이 달걀을 맞거나 책화형식을 당했다면 정희준이 “이것이 민주사회에서 이견을 표출하는 합리적인 방식이야.”라며 지긋이 웃고만 있었을 것인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지만 국가보안법이나 민주화 이후의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을 우리가 문제삼는 이유는 그것이 피해자를 공동체 바깥으로 내모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꼼수를 반진보적이나 반페미니즘적이라고 비판하고 재단하는 것을 (그것이 적절하든 적절하지 못하든) 이런 행위와 비슷한 것이라 인지한다면 이 사회에선 어떠한 토론도 불가능하다. 전쟁시기엔 인민군에게 쌀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국방군에게 ‘소거’당할 수 있었고, ‘박정근 사건’에서 보이듯 국가보안법은 오늘날도 사상과 신념을 자의적인 잣대로 처벌한다. 조선일보의 가장 최근의 사상검증 시도인 ‘최장집 사건’(98년)의 경우 “좌파/친북세력은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예전보다는 다소 완화된 논리를 관철시키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최장집 사건’의 문제는 그 시도 자체가 사상검증의 욕망을 띄고 있었다는 것에도 있지만 최장집의 논문을 비판하는 방식이 엉터리였다는 측면이 더 크다. 당시 최장집은 월간조선의 ‘왜곡보도’를 법원에 가져가 가처분신청을 했고 법원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두 사건은 비교하기엔 너무나도 심각한 격차가 있지만 어쨌든 정희준이 오늘날 나꼼수 비판자들을 비판하려 한다면 ‘사과 요구’를 ‘사과 강요’로 탈바꿈하여 위헌적 행위로 색칠하는 변태적 논변을 멈추고 합리적 비판을 할 일이다. “여기에서 지식인이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사건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다.”란 말을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하나 정희준이 결정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나꼼수에게 요구하는 ‘사과’의 성격이다. 나꼼수 멤버들이 그 사건은 성폭력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 신념을 꺾고 그들이 성폭력범임을 인정하라는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면 정희준의 주장은 그나마 맥락이 조금은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나꼼수에게 요구하는 사과는 “어쨌든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으니 미안함을 표시해 달라.”는 것에 가깝다. 이 논란을 이 정도로 키운 것은 원래부터 나꼼수와 각을 세웠던 일부 진보지식인이나 나꼼수의 감각과 타협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 당연한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다. 나꼼수의 시위 독려, 비키니 시위를 소비하는 남성 청취자들의 방식, 그 방식에 대한 성찰없음, 논란이 커지는 상황에 대한 나꼼수의 안이함 등에 상처입은 다수 청취자들이다. 이들은 나꼼수를 단죄하고 싶어 한다기 보다 다시 맘 편하게 나꼼수를 즐기고 싶은 심경으로 사과를 요구한다. 그런데 나꼼수는 방송에선 ‘침묵의 자유’를 행사하며 강연회와 인터뷰를 통해 흘러나온 말들로 간접적인 입장표명을 했다. 그러자 공지영처럼 그 말만 듣고 다시 그들에 대한 지지를 확인한 사람도 나타났는가 하면, 삼국카페 성명서처럼 ‘이미 사과를 요구할 단계는 지나갔다.’며 지지철회를 천명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사과요구에 묵묵부답이니 지지철회로 나아간 것이다. 이처럼 사적인 관계에서든 공적인 관계에서든 우리는 보통 관계를 파탄내겠다는 결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사과를 요구한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뜬금없는 헌법정신의 발동으로 거꾸로 뒤집은 정희준의 말장난은 ‘사건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 나꼼수의 비키니녀 사진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현직 MBC 부장급 여기자가 문제가 됐던 ‘비키니녀’와 동일한 포즈로 가슴에 문구를 새긴 비키니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했다. MBC 부장급 여기자로 <뉴스데스크> 팩트체커를 맡고 있는 이보경 MBC 기자는 3일 오후 자신의 트위터에 비키니녀와 동일한 포즈의 사진을 올리고,“저도 나와라 정봉주 하고 있습니다”라며 “마침 직장이 파업 중이라 한가해졌어요. 그래서 노구를 이끌고서리ㅋㅋ”라고 설명했다.ⓒ이보경 트위터
그렇지만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정희준은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지점들을 짚고 있기는 하다. 그는 “미국의 진보적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마돈나를 비난하고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과문한 탓이라 확신할 수 없지만 마돈나에게 사과를 요구한 사람이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추측해보자면 그렇더라도 마돈나의 ‘성해방 전략’의 한계를 지적하는 페미니즘적 분석은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잠깐 정희준이 짚어만 놓고 전혀 분석하지 못한 영역을 개척해 보자. 페미니스트가 나꼼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록 그것이 정희준이 말한 것처럼 위헌적인 책동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소 생뚱맞은 느낌이 있기는 하다. 만약에 나꼼수가 그 마초적 행동에 대해 페미니스트에게 사과해야 한다면 그들 인생에 남은 날들을 모조리 사과로 채워도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와 나꼼수 멤버는 여성문제에 대한 관념이 다를 것이고 이것은 토론의 대상이지 사과를 받을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시선으로 나꼼수와 그 지지자들의 행동을 비판/비평하는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한 페미니스트가 자신들에 대한 사과가 아닌, 나꼼수 여성청취자들에 대한 사과를 권유했다면 그것도 또 다른 얘기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사과라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누군가에 대한’ 사과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희준이 걸핏하면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 사회 문화에 짜증을 낸다면 나도 거기에 동의할 수 있는데, 그 문화가 짜증나는 이유는 그 요구가 위헌적인 행동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행동이 사과의 대상을 두루뭉술하게 하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을 흩트리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사과의 방식은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일 것이다. 정말로 사과의 대상을 ‘국민’으로 삼을 만한 사람들도 있다. 이를테면 정치인이라든지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운동선수나 연예인을 추가해야 마땅하단 의식이 겹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밑도 끝도 없는 ‘공인’이라는 잣대로 사과를 요구하는 그 문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국민의 일원이지만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도박을 하거나 음주운전을 했다는 이유로 내게 사과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그저 법리에 근거한 처벌을 받으면 족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나는 이명박의 정치적 행동들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나꼼수가 증명하려고 애썼던 바 그가 에리카김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게 내게 사과할 일이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만약 그에 대해서 이명박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불특정 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김윤옥이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 견해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무언가 명확한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어렴풋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라 부를만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깨달을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사적 영역의 문제는 각자에게 (가령 이명박과 김윤옥에게) 관계하면 되고 공적 영역의 문제는 좀 더 폭넓은 이들에게 (가령 이명박과 국민에게) 관계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나꼼수가 어떤 청취자들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그것은 사과를 할 일일까, 아닐까? 대부분의 라디오방송 진행자들은 ‘물의를 빚으면’ 사과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정한 윤리적 원칙이라기보다는 ‘소비자 중심주의’에 가깝다. 우리가 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장사라면 되도록 많은 사람의 감성을 포괄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감성을 추스르기 위해 엇나간 부분이 있을 때 재빨리 ‘사과’를 하는게 현명하다. 그런데 아마도 나꼼수는 자신이 하는 일은 그것과는 좀 다르다고 믿을 것이다. 정치의 문제는 한편으론 표장사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여러 종류의 신념의 문제에 접속한다. 아마도 나꼼수는 자신들은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혹은 이 사건에는 자발적으로 비키니 시위에 나선 이들의 신념의 문제도 얽혀 있기에 사과할 수 없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모종의 윤리적인 태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나꼼수의 지지자들은 마치 마돈나 콘서트의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가 불쾌한 관객은 그저 콘서트장을 이탈하면 되는 것처럼, 불쾌감을 느낀 이들에게 “그럴거면 그냥 나꼼수를 듣지마라. 사과를 요구하지는 말고.”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 역시 콘서트의 문제라면 완벽하게 그렇겠지만 나꼼수의 경우엔 그렇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시장주의의 ‘소비자 담론’과 정치담론이라는 공공영역의 문제가 교묘하게 얽혀 있는 것을 본다. 아마 내가 (현재 내가 구분하고 있는 몇몇 요소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나꼼수 멤버의 처지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요즘 ‘반MB’를 ‘진보’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을 진보의 울타리에 가두고 진보의 도덕성을 강요하는 것은 진보의 폭력이다.”라는 정희준의 말이 놓치는 것은 이 부분이다. 나꼼수를 부담스럽게 하는 이번 논란이 ‘진보의 도덕성 담론’이 아니라 나꼼수의 청취자/지지자 사이의 상이한 감각에서 나왔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꼼수는 원래부터 마초적이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렇게 비판하느냐.”라는 반론이 허망한 건 그래서다. 사람들이 왜 하필 이 건에서 분노했는지는 비평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나꼼수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와 비슷한 소리를 하는 이들은 많았는데 왜 저 네 명만 슈퍼스타가 되었는가? 불공평해!!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무용한 것과 비슷하다. 또한 나꼼수와 그 지지자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기존 진보’ 진영에 요구하던 것이 저 정치적 신념의 영역을 일종의 ‘소비자 중심주의’에 복속시키는 길이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은 그들이 ‘기존 진보’에 요구하던 것들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반MB진영의 결속’을 위해 사과해야만 한다. 정희준은 그들의 정치적 신념을 옹호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사실 나꼼수는 그간 그딴 걸 강조하는 건 진보의 우월의식에 불과하니 ‘국민의 뜻’을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았던가.

다시 나온 정희준의 ‘도덕성’ 담론

그러나 이 복잡한 논의를 회피하기 위해 정희준이 뽑아드는 ‘전가의 보도’는 예의 그 ‘도덕성’ 담론이다. 그는 ‘곽노현 논란’ 정국에서 작년 9월 4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도덕성, 보수에게 던져버려라>라는 칼럼에서 내세웠던 논지를 반복한다.

정희준의 논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원래 도덕성은 보수의 덕목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진보진영은 권력이 없어 보수의 부패와 비리를 지적하다 보니, 나중에 보수언론이 진보를 공격할 때 써먹기 시작한 게 ‘진보의 도덕성’이다. 그러나 진보는 도전/저항/변화를 추구하고 때로 법과 공권력에 맞서기에 도덕성과 관련이 없다. 진보는 도덕성을 보수에게 줘버리고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 얘기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플라톤 <국가>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의 저 오래된 경구나,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비판, 포스트모던 정치철학과 ‘아주 약간’ 포개지는 부분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런 지적 조류에 나온 경구들을 자기 멋대로 활용한다. 사람이 진보로 살다보면 가두시위를 할 때 도로교통법과 집시법을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실정법보다 더 높은 헌법적 가치를 따른다고 주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진보라고 해서 마음대로 음주운전을 해도 된단 말인가? 정희준의 얘기엔 이런 논변의 걸음마에 해당하는 물음이 빠져 있다. 진보에게 보수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모든 도덕을 지키라고 말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언제나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경쟁하고 있는 도덕률 중에서 진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닐까?

그런데 그는 이런 ‘상식적인’ 질문을 회피한 채 ‘도덕성’의 요구가 과대한 사회를 개탄한다.

“인간의 욕망마저도, 감옥 간 친구 좀 웃어보라고 건네는 농담마저도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로 재단하려 드는 진보. 개인의 실수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꼭 쫓아가서 끝까지 사과를 강요하는 진보. 양심의 자유도 무시하고 사상검증하겠다는 진보. 얼치기 보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진보. 그리고 꼭 대중을 가르치려 드는 진보. 전지구적으로도 참 보기 드문 진보다. MB정부가 시계를 80년대로 돌렸다면 이 진보 역시 80년대에 머물러있다. 이 촌스런 진보를 어째야 하나.”

정리하자면, 한국 사회엔 확실히 ‘표현의 자유’가 부족하고, 어쩌면 ‘도덕성의 요구’가 과대한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가의 인권침해 문제가 온존하기 때문에 인종/지역/성적 문제에 대해 마음껏 비하발언 할 표현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수적 도덕률이 강하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이 모든 도덕성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전경련 등 한국의 재벌옹호자들이 “한국 사회는 ‘기업하기 힘든 나라’이기 때문에 재벌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오류다. 한국 사회가 중소기업하기 힘든 나라이지 어디 재벌기업 운영하기 힘든 나라란 말인가. 현실을 보고 사안을 구별하지 않고, 어휘가 같다고 논변을 이어붙이면 이와 같은 해괴한 주장이 탄생한다.

정희준의 주장을 논파하는 걸 넘어 그가 말한 지점을 고민해 보자면 또 다시 ‘공사 구분 문제’가 나온다. ‘감옥 간 친구 좀 웃어보라고 건네는 농담’과 ‘감옥 간 친구에게 건넨 접견서신’은 원래는 사적 영역의 것이다. 만일 누군가 이걸 유출해 문제삼으려 한다면 사생활을 침해당한 이들을 옹호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감옥 간 친구 좀 웃어보라고 건네는 농담’이 동시접속자가 100만 명에 달한다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나왔고 ‘감옥 간 친구에게 건넨 접견서신’이 28만명의 팔로어가 보는 ‘스타 기자’의 트위터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인터넷 공간에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시민들의 욕망은 공사구분을 무너뜨리고 있다. 어떤 특정한 국면이 되면 사람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일개인이 싸이월드, 트위터, 블로그에 올린 의견표명에 집단적으로 몰려가 항의를 한다. 이게 규모가 커지면 ‘사이버테러’라고 불릴 지경이 된다. 연예인들은 그런 일을 당할 가능성이 큰데, 2PM 멤버였던 박재범의 사례가 대표적인 것일 게다. 그러나 박재범만 하더라도 몇몇 친구들만 볼 수 있는 마이스페이스에 올린 글이 나중에 ‘유출’되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문제들과 비교해볼 때 이 사례는 ‘관음증 진보’들이 사생활을 침범하여 도덕성을 관철시키려는 시도로 보기엔 심하게 민망하다.

나꼼수에게 바라는 것

나는 나꼼수 멤버들의 의도를 이해한다. 감옥에 있는 정봉주는 비키니 사진을 보고 성욕을 불태울 심리상태도 아닐 것이며 사진을 보면 시민들의 지지에 왈칵 눈물이 터지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들은 정권의 탄압에 맞서, 그들이 그런 상황에서도 얼마나 발랄할 수 있는지를 과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시의 방법이 어떤 마초적인 것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알파수컷에게 유배당했지만 그곳에서도 우리의 남근은 짱 세고 잘 선다는 것을 과시하고픈 뭐 그런 욕망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방송을 통해 권유되지 않았다면, 접견서신을 그저 그들만이 (사찰하는 정부와 함께) 공유할 뿐 트위터에 올리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이 상황이 몹시 당혹스러울텐데, 그들이 ‘정권에 맞서 목숨을 거는’ 일에는 경험이 많은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일’에 딱히 익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김용민 정도는 예외로 둘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윤리의식이 맞는지를 논하는 문제를 떠나서 보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내고 조장한 행위들이 어떤 여성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사실이다.

나꼼수는 시위여성을 위해서라도 사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쁜 자세는 아니지만 그 문제는 얼마든지 우회가 가능하다. 나꼼수를 비판하는 이들 중 대다수는 ‘자발적인 비키니’ 시위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나꼼수는 그 시위를 조직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을 소외시킨 부분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청취자의 비판을 ‘조중동 알바’ ‘꼴페미’ ‘진보정당원’의 것으로 주변화시키려는 나꼼수 팬덤의 분위기에 대해서 우려를 표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김용민이 관리자로 있다고 알려진 정봉주 팬클럽 ‘미권스’(정봉주와 미래권력들)의 덧글이라고 웹에 공개되는 것들을 보면 문제제기하는 여성들에 대한 성적 비하 및 성폭력적 언사가 너무나도 심각하여 포털사이트 덧글이나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보다도 훨씬 저질로 여겨질 지경이다. 적어도 나꼼수는 이런 분위기에 대해선 통제를 하거나, 우려를 표해야 한다.

나꼼수는 설마하니 일부 지지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바대로 무엇에 대해서든 한번 무릎을 꿇으면 자신들의 기획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하지만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사과하는 것은 무릎을 꿇는 것과 같지 않다. 또한 이명박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것과 지지자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은 전혀 결이 다른 일이다.

나꼼수의 지지자들은 나꼼수가 ‘해적방송’, ‘B급문화’, ‘잡놈’들의 것이라는 이유로 나꼼수에게 쏟아졌던 그 ‘대표성’을 부정하며 사과의 요구를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나꼼수는 대중적 인기를 누린 이유로 다소 과잉되게 진보개혁 세력의 대표성을 부여받았으며 (민주언론상 수상을 포함하여, 이는 적절한 일이 아니었는데, 물론 이는 나꼼수만의 책임은 아니다.) 본인들이 그 위치에서 이탈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영향력을 활용하여 ‘기존 진보’ 세력에 대한 충고를 계속해 왔다. 그리고 나꼼수 팬들은 오직 나꼼수만이 오늘날 진보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믿고, 주장했으며, 나꼼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견이 있는 사람들은 ‘입진보’라고 규탄하였다. 그러던 이들이 이제 와서 나꼼수가 원래부터 저질방송이었음을 인정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귀에 맞지 않다. 그들의 주장처럼 타란티노를 끌여들여 나꼼수 비판자들이 ‘B급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예전에 시민들이 경기도지사 김문수의 “<춘향전>은 춘향이 따먹는 이야기” 발언을 비판한 것은 홍상수의 영화미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길 수 있을 게다.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서 다른 사건에 적용해 보면 민망한 일이 발생하는 옹호담론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굳이 ‘사과’가 아니더라도 나꼼수가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청취자에 대한 미안함과 이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면, 나머지 문제들은 정희준이 바랐던 바처럼 ‘사건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이들의 것으로 남겨질 것이다. 그런 행동은 이미 지지철회를 발표한 삼국카페 회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효과를 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꼼수에 대한 비판담론을 주변화하는 그들 내부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데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나라를 통치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정권이 뭔가를 잘못해서 사람들이 ‘좌파’가 되고 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좌파’이기 때문에 정권에 반대한다고 믿는 데에 있다. 마찬가지로 나꼼수와 그 지지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주변화시키는 행동패턴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는 개혁성향 누리꾼들의 인터넷 토론문화 전반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꼼수의 지속적인 번영여부가 2012년 총선/대선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는 굳이 묻지 않더라도 말이다. 나꼼수 멤버 및 그 지지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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