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겨레 김종철 논설위원은 오늘자(9일) 칼럼에서 이씨를 ‘우주비행 참가자’로 정의했다. 김 위원의 칼럼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2001년부터는 사실상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우주관광 시대가 열렸다. 미국의 억만장자인 데니스 티토가 처음 문을 연 뒤 지금까지 4명의 부자들이 관광차 국제 우주정거장에 다녀왔다. 모두 러시아의 소유스호를 이용했으며, 비용은 각각 대략 2000만 달러가 들었다. 이들 일시적인 우주인은 우주비행사(astronaut)가 아니라 우주비행 참가자(spaceflight participant)로 불린다. 사업비 260억원(2800만 달러)을 들여 어제 소유스호를 탄 이소연씨도 ‘우주비행 참가자’다. 어쨌든 이씨의 비행이 한국인 우주비행사 시대를 앞당길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 중앙일보 4월9일자 2면.
한국 최초 ‘우주비행 참가자’ 이소연씨

8일 MBC <뉴스데스크>와 인터뷰를 한 서울대 김승조 교수는 “완전한 과학기술자로서는 아직은 모자라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완전히 또 관광객은 아니고 …”라고 말했다.

어찌됐든 대다수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는 우주비행사도 아니고 완전한 과학기술자도 아닌 상당히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애매한 상황은 사실 이 뿐만이 아니다. 현재 정부와 대다수 언론은 이번 ‘우주인 사업’을 계기로 마치 한국이 본격적인 우주시대에 접어든 것처럼 ‘선전’하고 있지만 따져봐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경제적 효과.

▲ 국민일보 4월9일자 1면.
오늘자(9일) 한국일보는 “허희영 한국항공대 교수는 최근 ‘한국 우주인 사업의 사회경제적 효과’ 보고서에서 우주인 배출 사업의 경제적 효과를 4,780억원으로 추산했다”면서 “실제 우주인 사업에 드는 예산(260억원)의 18배에 달하는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한국 우주인 사업의 사회경제적 효과가 매우 큰 것으로 보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망에 불과하다.

우주인 사업에 대한 일방적 여론은 위험하다

오히려 지금 우리 앞에 던져진 냉정한 현실은 오늘자(9일) 한겨레 사설에 잘 나타나 있다. 일부 인용한다.

“우주항공 과학계는 우주기술이 과학기술 발전의 척도로 일컬어질 만큼 첨단 분야이며 경제적 부가가치도 높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한 차례의 우주인 사업으로 마치 우주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환상을 심거나 기대를 부풀려 후속사업을 밀어붙이는 것은 곤란하다. 260억원을 들인 이번 우주인 사업도 전적으로 남의 기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내실 있는 우주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우주공간의 과학 실험도 초보적 수준이며 과제 수행에 들어간 예산은 보잘것없다고 한다.”

정리하면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어가는 만큼 우선순위와 경제적 효과를 면밀히 따져서 우주사업을 추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 앞서 우주인을 배출한 국가가 35개나 되지만, 그 효과를 이어간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언론보도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한겨레 4월9일자 사설.
물론 한국이 이번 ‘우주인 사업’으로 우주 과학기술 발전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평가해 줘야 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 못지않게 막대한 예산과 사업의 불투명성 등을 감안할 때 우주선 개발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보다는 기초 우주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와 연구가 착실히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천문학적인 예산 투입되는 우주사업 … 실패한 국가도 많다는 점 유념해야

이는 현재의 우주인 사업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원사이드 여론’ 즉 ‘장밋빛 환상’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SBS가 주관방송사로 '참여'한 것을 어느 정도 고려해도 SBS의 우주인 관련 보도와 프로그램은 지나치게 '장밋빛 환상'으로만 흐르고 있다. 하지만 오늘자(9일) 대다수 아침신문을 보니 SBS 뿐만 아니라 이들 언론에게 최소한의 현실감각을 유지하라는 요구 자체가 대단히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일회성 행사로만 밀어붙여서는 안 되며 특히 군사적 목적의 우주개발은 신중해야 한다”는 한겨레의 지적이 다소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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