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정부가 곧 국가다. 아니,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대통령을 왕과 동격으로 비유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행차에 길거리의 시민들이 엎드려 큰 절을 올렸던 것이 불과 50여년전 일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정부권력은 가부장적 권위주의 문화 속에서 잉태돼 그 세력을 키워왔다. 군과 경찰이 엄호하고 정부와 유착한 대기업이 그 뒤를 받쳤다.

해방이후 수십년동안 거대 재벌로 성장한 대기업들은 금권을 통해 정부와 법률가, 전문인 등을 포섭하고 이 네트워크를 구조화시켰다. 수백여명의 고위급 판검사와 국세청 간부들이 삼성에 들어가고 정부나 국회가 김&장에 법안 문의를 하는 지경이니 이들의 밀착관계가 얼마나 촘촘하고 강고한지는 짐작코도 남는다.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군과 경찰을 통해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했다면 지금은 권력과 돈이, 겉보기에는 화려한 소비문화와 결합해 시민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비문화가 융성한 사회에서 언론, 특히 TV는 시민들의 이성을 무디게 하는데 안성맞춤인 도구다. 더욱이 말로만 공영방송이지 사실상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방송사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사실 KBS도 법적으로는 정부출자기관이다. MBC, EBS, YTN마저도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소유구조에 놓여 있다. 아리랑 TV나 KTV는 말할 것도 없다. 방송사뿐만 아니라 신문사까지 모두 소유하고 있는 중국정도는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정부가 언론을 갖고 놀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이러니 외국 학자들이 KBS를 국영언론사(Government Agency)라고부르는 것도 당연하다. KBS의 기자와 프로듀서들이 해외로 공부를 하러가 가장 충격을 받는 것중의 하나가 “너희는 국영언론사”라는 말이다. 심한 반감을 갖고 따져보지만 소용없다. 국내에서 아무리 공영이라고 외친들 바깥에서는 아무도 KBS를 공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시스템, 문화 그리고 그동안의 역사가 우리의 허위의식을 배반해왔다는 말이다. KBS를 공영방송(Public Agency)라고 부르는 서양의 학자들은 내가 아는 한 전무하다.

자, 그럼 우리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정부는 강고하고 가부장적 권위주의 문화는 여전하다. 거의 모든 산업분야가 5개 내외의 대기업 집단에 의해 독과점돼 있고 방송은 정부에 의해 장악되기 쉽고 민간 언론사는 거대 광고주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끈끈하게 유착된 거대한 기득권과 비교하면 시민들의 힘은 고립되고 왜소하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아마 이런 형태일 것이다.


▲ 현재의 한국

이 그림에서 개인은 한낱 점에 불과하다. 더욱이 한낱 점에 불과한 개인들을 이어줄 소통과 연대의 끈마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공동체는 희소하고 공동체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기관만이 가득하다. 개인은 없고 국가만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시민들은 막막하고 답답할 수 밖에 없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도 대신 말해줄 대표 기관이 없고, 직접 말하려고 해도 그 말을 가로막는다. 말을 가로막고 소통을 차단하면서 언론을 통해선 정부와 기업의 말만 쏟아져 나오고, 여기에 불만을 토로하면 왜 화합하지 않고 갈등을 조장하냐고 다그치는 형국….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 뒤 남의 의견을 듣고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판단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입부터 닥치게 하니 소통이 되겠는가? 대화가 불통인 상황에서 시민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시민이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면 국가가 제대로 기능할 수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 특히 KBS처럼 공영임을 자처하는 언론사는 어디에 위치해 무엇을해야 하는가? 언론사가 정부 기업과 끈끈하게 유착해 그 확성기 노릇만 자임하기만 하면 소통이 되고 화합이 이뤄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이 사회 기득권 세력의 치어리더인가?

우리가 언론의 역할에 다시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다. 시민들이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거쳐 투표만 잘해도 문제의 상당부분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합리적,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정확하고 폭넓은 정보다. 정부, 정치인, 기업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언론인들의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통해 만들어진 상식적 질문과 성실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것이 시민들에게 필요한 뉴스다. 그래서 상식적인 사회의 회복은 언론 본연의 역할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언론이 바뀌어야 한다. 바뀌지 않으면 바꿔야 한다. 누가?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 창피해서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언론인,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 개탄스러워 쥐약이라도 뿌리고 싶은 시민들이 나서는 수 밖에 없다. 나서서 말하자. 조직하고 응원하자. 연대하고 포용해서 합의하면 대세가 된다. 대세가 주류고 주류가 권력이다. 나꼼수나 뉴스타파가 KBS에 버금가는 신뢰도와 영향력을 갖게되는 오늘의 현상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전조일뿐이다. 한국 사회는 바뀌고 있고 한국 언론은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서동요는 임금을 부르는 서동요가 아니다. 누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를 구제할 것이라 노래부르는 천진난만한 설화가 아니다. 사실에 기반한 현상의 분석이며 무지개빛으로 포장되어 있진 않으나 낙관적일 수 밖에 없는 미래에 대한 예견이다. 시민에 대한 호소이자 내 자신에 대한 독려이기도 하다. 기득권은 퇴색할 것이며 시민사회는 확장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선순환의 나침반 위에 올라섰다. 이길 수 밖에 없다. 시민사회의 승리는 당위이자 멀지않은 미래가 됐다. 하면 된다. 정당한 권력을 추구하라. 대한민국의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고발했던 <9시 거짓말>의 저자로서, 현재 KBS 새 노조 공정방송추진위원회 보도부문 간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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