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지난 6월 국제인권단체 HRW(Human Rights Watch 휴먼라이츠워치)가 100여 쪽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HRW 보고서가 되었다. 보고서의 제목은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실태 조사 보고서였다. 하지만 정작 이 보고서가 지적하고 있는 당사자, '문제적 한국'에서는 우리의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하다는 세계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화제'조차 되지 못했다.

이에 KBS 1TV <시사기획 창>은 이 보고서의 내용에 기반하여 다큐를 구성한다. 도대체 우리의 어떤 모습이 세계인들의 눈에 '문제적'으로 보였던 것일까?

그저 뒷모습을 찍었다?

KBS 1TV <시사기획 창>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편

2016년 인천의 삼산동, 남자가 거리에서 여성들을 촬영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현장에서 체포된 남성의 핸드폰에는 여성들 뒷모습이 가득했다. 그런데 체포된 남성은 단순한 사진인데 무슨 큰 죄냐는 식이다. 이 남성의 행위는 범죄가 될까? 바로 이 남성의 행위를 범죄로 보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바로 우리 사회 디지털 성범죄 인식의 '바로미터'이다.

남성은 고의로 특정 부위를 찍은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몰래 찍은 건 아니라고 했다. 단지 자신이 상대방을 찍는다는 의사만 밝히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는 이처럼 기술과 성불평등이 어우러져서 벌어지는 범죄이다. 무단으로 성적인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거나 유포하는 범죄 행위다. 외국에서 한국의 사례가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무작위의 낯선 사람을 촬영해 유포하는 사례가 많다는 데 있다. 무작위의 여성, 결국 피해자인 여성은 그 어느 곳에서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6년 삼산동 사례에서도 보여지듯 그저 거리를 지나갔을 뿐인데, 불법촬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산동 사건의 '범인'은 단순히 사진을 찍었다고 했지만 전문가는 엄연히 관음증, 성도착이라 진단 내린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상대의 사진, 하지만 최근의 디지털 기술은 그저 뒷모습의 불과한 사진을 얼마든지 특정 부위를 확대해 볼 수 있는 기술을 지니고 있다.

KBS 1TV <시사기획 창>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편

문제는 이런 성중독에 의거한 성범죄가 외국에서도 주목할 정도로 최근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심각한 점은 범죄당사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범죄'로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남들도 다하는데 나만 재수 없이 걸렸다는 식으로 사고한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이런 범죄가 처벌받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성폭력 처벌법 14조엔 '카메라 등을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촬영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다.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몰래 촬영한 사건과 관련하여, 법원의 판결은 성적 의도, 그리고 피해자의 수치심과 관련하여 엇갈린 판결을 내렸다. 여전히 우리 법원은 법조문에 대해 ‘문구적' 해석에 치중하는 면이 있다. '자극적이고 수치스러워야 한다'는 기준에 매달린다. 이에 전문가들은 '동의 없이 상대방의 신체를 찍는 행위’ 자체가 처벌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진적인 법의식, 사회적 인식

KBS 1TV <시사기획 창>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편

친구네 집에서 샤워를 하다, 친구의 아빠가 설치한 '차키 몰카'에 당한 여성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 사건 이후 피해자는 약물 치료를 해야 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하지만 정작 가해자의 기소 이후 피해자는 사건에서 '관계자'로 배제되고 만다. 국선 변호인을 선임하여 수사 진행 상황을 알 수도 있지만 정작 이런 현실을 활용하는 피해자는 드물다. 피해자가 모른 채 사건은 종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도 외려 변호사가 합의를 종용하는 경우도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통계적으로 카메라를 이용한 성범죄 사건 중 불기소율이 43.5%나 된다. 기소가 된다 하더라도 징역형을 선고받는 경우는 단 2%, 지금까지 119명만 징역형을 받았다.

법원에서는 여전히 '대물'적, '대인'적 피해를 우선시하고 있다. 그래서 디지털 성범죄로 인한 피해자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다. 그러기에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을 맞춘다는 취지에서 낮은 형량이 나온다. 피해자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민사소송'이 있지만, 이도 여의치 않다.

KBS 1TV <시사기획 창>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편

온 나라를 공분케 했던 N번방 사건을 폭로한 '추적단 불꽃'은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는 텔레그렘을 고발한다. 1000명이 넘는 지인들이 모인 공간에서 아는 여성의 사진을 올려놓고 품평회를 하는 게 관행처럼 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지인 능욕', ’지인 합성'이다.

'20만원까지 내겠다', 이게 한 여성에 대한 평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간해라' 등 갖은 온라인 성폭력이 난무하고, 타인의 얼굴에 또 다른 타인의 신체, 성행위 장면을 합성하는 것이 유행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신상 정보를 나눈다. 피해자는 이유도 모른 채 낯선 이들에게서 메시지를 받고, 때론 모르는 남자들이 직장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신고를 해도, 대부분 해외 IP 주소로 벌어지는 이런 일들에 경찰은 무기력하다. 사진이 계속 돌아다니니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은 계속 이어진다.

물론 디지털 성범죄 지원센터가 생기면서 피해자가 요청하면 지원센터가 인터넷 사업자에게 삭제 요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노출 여부'라는 삭제 기준으로 번번이 논란이 되고 있다. 즉 대부분의 성범죄의 경우 가해자의 의도 파악보다 노출 여부라는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거리에서 여성을 불법촬영해도 노출을 했느냐 여부가, 어쩌다 본 남자친구 휴대폰 속 잠든 여성들의 나체보다도 남자친구 휴대폰을 몰래 봤느냐 여부가 우선되는 식의 ‘성긴 그물망’ 사이로 가해자들은 빠져나간다.

KBS 1TV <시사기획 창>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편

그러는 동안 디지털 기술은 발전한다. 4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성은 낯선 이들에게서 음란 문자를 받았다. 알고 보니 헤어진 남자친구가 앙심을 품고 확대 합성을 한 이른바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유포한 것이다. 그녀의 개인정보와 함께. 이 일로 직장도 그만두게 되고, 살던 집까지 옮기게 된 피해자. 하지만 검사는 소 취하를 권고했다. 피해자가 밖으로 다니지도 못한 채 인생이 망가졌다고 하는데, 가해자는 겨우 500만 원도 안 되는 벌금형에 집행유예, 사회봉사 명령이 다였다.

보고서가 주목한 건 나날이 발전되는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수법도 수법이지만,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를 '인격 살인'에 이르는 심각한 범죄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 사법기관의 안일한 판결에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러한 디지털 성범죄 결과물인 사진과 영상을 보는 것이 또 하나의 범죄라는 인식은커녕, 보는 게 별 것 아니라고 여기는 잘못된 성의식이 문제다. 기술의 발전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적 의식, 그 후진 의식은 나날이 교묘하게 늘어나는 새로운 방식의 성범죄를 방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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