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집 앞에 천이 있다. 천변 길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도 많이 이용한다. 서울의 천변 길과 달리 집 앞 천변은 산책로만 만들어졌을 뿐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살아있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길이다. 사계절을 다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고, 날씨의 농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새벽의 알싸한 공기와 아침의 청명한 하늘과 부스스 부서지는 점심 햇살, 저녁이면 산 너머로 번지는 진홍색 노을 사이로 떠오르는 달과 남청색 주단을 깔아놓을 것 같은 하늘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이 그림 같은 길이다. 봄이 되면 하천 제방을 따라 푸릇한 풀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쑥이 자라고 개나리와 목련, 벚나무의 꽃망울이 움트기 시작하고, 제비꽃이 핀다. 꽃에서 꽃으로 가볍게 나는 부전나비, 호랑나비, 긴꼬리제비나비 그리고 또 이름 모르는 나비가 난다. 산책하다 보면 찰방찰방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천에는 잉어와 붕어가 많다. 백로와 왜가리가 천에 긴 다리를 담그고 반나절을 묵묵히 서 있기도 하다. 여름이 되면 풀은 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자라 풍성한 풀냄새를 뿜어낸다. 감히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풀이 자라고 갈대와 억새가 자란다.

집 앞 천변길 산책로에서 만난 수달 (그림/사진=김은희)

빽빽하게 자란 풀숲 사이에서 산책로로 올라와 반대편 풀숲으로 사라지는 수달을 세 번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너무 신기해 멈춰서 다가가 수달을 쳐다보았다. 수달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바로 사라지지 않고 수풀 속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주시했다. 추측하는데 아마도 그 어디쯤 새끼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동안 나는 수달을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산책로를 오갔다. 다시 본 것은 일주일 뒤였고 아무도 없는 산책로를 재빠르게 뛰어가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보지 못했다. 수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병충해 방지를 위한 방역을 하는 것을 보며 내내 노심초사했다. 다시 수달을 만나는 것은 2년 뒤였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천 반대편 한적한 산책로에서였다. 너무 반가워 수달이 사라진 수풀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산책하다 보면 수달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산책길로 올라온 뱀을 두 번 보았고, 고라니를 한 번 보았다. ‘철새도래지’라는 푯말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꽂혀 있고, 들어가지 말고, 접촉하지 말라는 글 옆에 새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청둥오리와 기러기 떼가 겨울을 보내기 위해 날아와 천에 자리잡았다. 추수가 끝난 농지에는 낙곡을 먹는 기러기가 떼지어 앉아 있었다. 집 앞 천은 동물의 쉼터이다. 기러기가 떼지어 농지에 앉아있는 것을 보며, 백로가 한가롭게 천에 다리를 담그고 있는 것을 보며, 이를 관심을 가지고 보기는 하지만 접근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사람과 야생동물이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시에서 천변 길을 예쁘게 조성하기 위해 풀을 뽑고 굴착기를 동원해 땅을 갈아엎고 코스모스 길을 조성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도 코스모스가 예쁘게 피어서 길을 따라 걸으며 행복해했다. 그런데 가을이 끝나갈 무렵 다시 굴착기가 등장하더니 땅을 갈아엎었다. 천변은 풀 한 포기 없는 맨땅이-물론 내년 봄이 되면 또 예쁜 꽃이 피겠지만- 되었다. 그 바람에 백로와 청둥오리는 풀숲이 우거진 제방이 있는 곳으로 쉼터를 옮겼다. 산책로에 부쩍 사람들과 자전거 행렬이 많아지면서 산책로를 가로질러 수풀로 이동하는 동물은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집 앞 천변길 산책로에서 만난 백로, 청둥오리 (사진=김은희)

비가 내리면 천은 몸살을 앓았다. 물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동안 탁했다. 물고기가 찰방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축사와 하우스, 공장에서 흘러나온 오염수가 땅에, 천에 스며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비가 오고 난 후면 쓰레기가 떠내려와 다리 기둥에 차곡차곡 쌓였다. 어떻게 저런 물건이 떠내려올 수 있을까 의아한 것도 다리에 걸려 있을 때가 많았다. 의자가 떠내려오기도 하고, 1인용 소파가 걸려 있기도 하며, 종이 상자와 스티로폼은 필수 항목처럼 걸려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버리지 않고서야 떠내려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천은 백로와 청둥오리, 수달의 쉼터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오폐수를 슬쩍 흘려버리고, 굴착기로 땅을 갈아엎는 행동은 백로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것이다. 예쁜 코스모스가 핀 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천은, 천변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함부로 사용해도 된다는 특권은 없다. 우리의 산책로이기도 하지만 백로와 청둥오리 쉼터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은희, 소설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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