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벌은 단순한 기업집단이 아니다. 총수 1인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로서 다계열-다업종의 거대한 기업집단이다. 수직적-수평적 기업결합을 통해 잡제품에서 첨단제품까지 생산-판매에서 배타적 지배력을 행사한다. 업종의 전무화도 없이 거의 전 업종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다. 방대한 규모만큼이나 정치-경제-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한 자본권력이다. 때로는 전경련을 중심으로 연대해 경제-사회정책의 방향을 변경한다. 세계적으로도 한국의 재벌 같은 기업집단이 없다. 그 까닭에 구미언론은 재벌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없어 그냥 음역해서 ‘chaebol'이라고 부른다.

‘경제대통령’을 자임하고 나선 이명박 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비시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친재벌 정권임을 천명했다. 반대여론을 묵살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했다. 재벌기업의 무분별한 사업확장과 재무구조 부실화를 막는 장치를 없애버린 것이다. 또 균형 있는 경제발달과 경제적-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규제까지 완화 내지 철폐했다. 재벌이 자본-지식-기술-정보에서 열위에 있는 중소기업-자영업자의 존립기반을 와해시킬 근거를 만든 것이다. 고환율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수출대기업에 특혜적 환차익을 베풀고 대신에 국민에게는 고물가의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돈이 넘쳐나자 재벌3세들이 중소기업-자영업자의 사업영역을 침탈해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다.

창업1세는 기업가적인 모험정신이 강한 편이었다. 정부도 산업화 과정에서 정책적으로 기간산업 위주로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당시에는 소비재 위주의 재벌에 대해서는 비판여론이 만만찮았다. 하지만 3세는 다른 모습이다. 미국에서 돈 벌만한 소비사업을 눈여겨보고 와서 돈벼락을 쳐서 영세사업자를 몰아낸다. 유통시장, 사치품수입, 외식사업 등이 주류를 이룬다. 빵집, 술집, 밥집, 옷집 등이 고급스런 서양풍이 나면 뒤에 재벌3세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고급화-고가화 전략을 통해 중소기업-자영업자를 공략하는 것이다.

유통재벌이 동네상권을 육식공룡처럼 먹어치웠다. 구멍가게는 거의 전멸상태다. 유통재벌 계열의 백화점은 세계적 유명상표만 취급하는 최고가품 전문점으로 탈바꿈했다. 대형마트라는 양판장은 생활용품 중심으로 판매전략을 전환했다. 여기에는 식당, 정육점, 쌀가게, 생선가게, 철물점, 문구점, 옷가게, 꽃가게, 빵가게, 미장원 등등에 수선집까지 있다. 자영업자의 모든 영역을 취급하면서 중소도시까지 침투했다. 그것도 모자라 몸집을 줄여 골목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양판장에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동네로 가서 고객에게 배달까지 해주는 이른바 슈퍼슈퍼마켓이 그것이다. 구멍가게에 이어 빵집, 떡집, 밥집 사냥에 나서 서민 삶의 터전을 뺏고 있는 것이다.

▲ 호텔 신라가 자회사 '보나비'가 운영 중인 베이커리 카페 '아티제' 사업을 철수한다고 지난 26일 밝혔다. 커피숍과 빵집 등 재벌 기업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 가운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녀가 이끄는 호텔신라가 제과·커피 사업 철수하는 결정을 내렸다. ⓒ연합뉴스
전두환 치하에서도 재벌 빵집에 대한 비판여론이 뜨거웠다. 1984년 삼성계열의 신라호텔이 제과업에서 손을 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이제는 재벌가 손녀들이 빵 싸움에 나서 나라가 시끄럽다. 삼성, 롯데, 신세계 등 굴지의 재벌들이 앞 다퉈 빵집을 차렸다. 프랜차이즈업체가 전국의 빵집을 싹쓸이했다. 파리바게뜨는 빵매장 3,000여개 이외에도 떡집도 170개나 두고 있다. CJ는 빵매장 1,400여개 말고도 비빔밥을 판다. 범LG가 분식, 일본 라면, 비빔밥, 덮밥을 팔고, 농심이 일본 카레, 애경이 일본 라면, 일본 카레를 들여왔다. 매일유업은 인도 식당, 남양유업은 이탈리아 식당을 운영하고 대명은 떡볶이 장사에 나섰다. 재벌3세들은 유명의류 등 고가사치품 수입에도 열을 올린다. 두산, 효성, GS의 간판업종은 외제차 수입이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1%가 99%를 약탈하는 자본주의의 더러운 탐욕을 질타한다. 그것은 세계인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월가 점령은 이제 반자본주의자의 선동적인 시위구호가 아니다. 지난달 25~29일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대안 찾기에 뜨거운 토론이 있었다.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자 정당마다 재벌개혁을 합창한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선거철의 득표용 재벌 때리기라고 보기에는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간다.

그런데도 천민자본주의에 도취한 재벌3세들은 돈 되는 일이면 무슨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자만에 빠진 모습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19세기 말엽 미국사회에 풍미하던 독점자본의 약탈과 횡포는 결국 반동을 부르고 말았다. 산업자본의 독점을 방지하고 경쟁을 촉진하는 반트러스트법 제정이 그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자본주의가 존경하는 철강왕 카네기와 석유재벌 록펠러가 탄생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