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 실눈뜨기] 강박적으로 규칙적인 메트로놈 소리, 몽환적인 신시사이저 음악, 원초적인 타악기 소리가 한데 섞인다. 21세기의 만신전이라 불러도 무방한 마블로고와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은 Pink Floyd의 Time. 팝음악에서 가장 광대하고 심오한 주제를 다룬 심각한 음악이지만,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둔 1973년작 <The Darkside of the Moon>의 타이틀곡이다. <이터널스>로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잡겠다는 클로이 자오와 케빈 파이기의 야심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선곡이다.

이들의 야심은 이중고의 또 다른 표현이다.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려는 초조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초조함은 보여주기보다 말하기로 영화의 주요 내용을 전달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고충도 이해는 된다. <이터널스>에서는 관객들에게 익숙한 MCU 캐릭터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이 대사로만 언급될 뿐이다. 팀업무비였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보다 2배나 많은 10명이 신규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우주적 존재인 셀레스티얼을 둘러싼 이터널스와 데비안츠의 관계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화려한 액션과 마블의 가벼운 유머를 기대하고 갔다가는 다소 실망할지도 모른다. 액션이 적은 건 아니지만 드라마에 투자하는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가끔 숨통이 트이는 마블식 유머도 등장하지만 말 그대로 신화적 배경 위에서 펼쳐지는 진지한 논의들로 인해 금세 불씨가 사그라진다. MCU 역사상 최악의 평점을 받은 이유가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된다. 그래도 <이터널스>는 단점보다 장점을 더 많이 언급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이터널스' 스틸컷

신들의 시빌워를 통한 세계관, 윤리관의 확장

<이터널스>는 MCU 페이즈4의 세 번째 영화지만 사실상 출발선이나 다름없다. <블랙 위도우>는 초대 어벤져스 멤버에 대한 뒤늦은 헌사이자 페이즈3와 페이즈4의 연결고리였다. <샹치>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살펴보기 전에 가벼운 몸을 푸는 준비운동에 가까웠다. <이터널스>가 떠맡은 과제는 앞선 두 영화보다 훨씬 무겁다. 페이즈3까지 열렬한 환호를 보내온 기존의 주민들도 만족시키고, 익숙하지만 다소 지루해저버린 세계관을 리모델링해 선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클로이 자오는 MCU에서도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기로 마음먹은듯 보인다. 진앙의 중심이 아니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오는 여파에 주목하는 관조적 태도를 연출에서도 활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노매드랜드>는 금융위기가 주요한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클로이 자오는 금융위기 자체의 긴박하고 급속한 몰락이 아니라 긴 시차를 두고 찾아오는 여파로 인한 경제 위기로 무너지는 공동체, 해체되는 가족, 떠돌이를 택한 개인의 삶을 그렸다.

<이터널스>도 숙적 데비안츠와의 대결이 중심 서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갑자기 드러나는 진실로 인한 이터널스 멤버들의 입장 변화에 주목한다. 열 명의 이터널스들은 인간처럼 희노애락애오욕에 휩싸이며 급기야 본격적으로 시빌 워(내전)에 돌입한다. 물론 이전에도 초인등록법을 두고 슈퍼히어로들의 분열을 다룬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있었다. 하지만 <시빌 워>는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개인사를 둘러싼 충돌이 핵심이었고 윤리적 문제를 다룬 초인등록법은 갈등을 폭발시키기 위한 방아쇠였다.

이런 갈등구조를 통해 <이터널스>는 MCU의 창조와 소멸을 둘러싼 우주적 규모의 세계관과 동시에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윤리관의 확장으로도 자연스럽게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영화는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질문이다. 신과 같은 권능을 지닌 이터널스들은 피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에 개입을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이터널들의 리더인 프라임 이터널 에이잭(셀마 헤이엑)은 개입을 금지하지만 드루이그(배리 케오간)는 이에 반발해 소수의 인간과 함께 아마존 밀림으로 숨어버리고 결국 이터널스도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 '이터널스' 스틸컷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정당한지 묻는 두 번째 질문은 MCU가 다루어온 주제의 연장선이다. <인피니티 워>, <엔드게임>에서 타노스는 균형을 위해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손가락으로 날려버렸다. 나름대로는 공멸을 막아보겠다는 의도였으나 결국은 악의를 지닌 빌런의 비뚤어진 신념에 불과해 논박이 쉬웠다. 그러나 <이터널스>의 질문은 더 까다롭다. 선의에 가까운 절대자가 진행하는 창조와 파괴라는 우주적 섭리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데비안츠로부터 인류를 지키라는 임무로 파견된 이터널스지만 두 문제에 대한 입장은 각자 다른 권능처럼 다양하다. <이터널스>는 캐릭터의 다양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다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관객이 어떤 캐릭터의 입장에 동의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로 그려질 여지가 충분하다. 이 점은 사실상 캐릭터 소개에 머물러 관객의 감정적 동화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리즈 1편들의 단점을 현명하게 극복한 경우다.

<이터널스>는 70억 인류를 대변하듯 인종, 성별, 나이, 장애, 성적지향을 초월한 캐스팅과 캐릭터 구축으로 화제가 됐다. 한국의 마동석이 길가메쉬로, 사실상 주인공인 세르시도 중국계인 젬마 찬이 캐스팅됐다. 원작에서 일본 닌자처럼 묘사된 킨고는 인도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캐릭터로 각색됐고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 로런 리들로프가 마카시 역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만큼 우려도 컸다. 다양성을 전시하는 데 그치고 뻔한 메시지만 던지다 끝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기우였다. 유색인종이 겪는 차별도 없고 게이 부부의 키스씬이 등장하지만, 등장인물 누구도 호들갑 떨지 않는다. <이터널스>의 세계관에서는 누가,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하든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차별이 사라진 유토피아라는 눈 가리고 아웅의 설정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단호한 선언에 가깝다.

영화 '이터널스' 스틸컷

MCU 르네상스의 새로운 가능성

<이터널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페이즈 4에 돌입하는 MCU의 궁극적 목표는 MCU를 현대의 신화로 만드는 단계를 뛰어넘어 인류의 신화를 MCU에 편입시키려는 과감한 도전으로 느껴진다. 페이즈3까지는 불완전한 인간이 다양한 고난을 겪으며 신처럼 고결하고 위대한 선택을 하는 과정을 그려졌다. 자기밖에 모르던 아이언 맨은 우주를 위한 핑거스냅을 했고, 캡틴 아메리카는 묠니르를 들었다. 페이즈4는 어떨까. 이카리스(리처드 매든)와 테나(안젤리나 졸리)의 캐릭터 대비에서 단서를 찾을지도 모른다.

이카리스는 이터널스 멤버들 사이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소개된다. 유일하게 비행이 가능하고 눈에서는 강력한 코스믹 에너지를 내뿜으며 데비안츠를 물리친다. 다소 비정해 보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강력한 의지와 리더십은 잠정적인 차기 프라임 이터널스로 꼽히는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테나도 강력한 이터널스다. 이터널스들의 고향인 올림푸스의 가장 위대한 전사이자 인류에게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테나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과거의 기억이 중첩되는 매드 위리 증후군으로 혼란을 겪으며 다른 동료들을 적으로 착각해 공격하기도 한다. 이터널스가 뿔뿔이 흩어지던 순간. 그녀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길가메쉬(마동석)는 돌봄을 자처한다. 테나는 스스로 능력을 봉인하고 인적이 없는 호주의 사막 한가운데서 살아가길 택한다. 테나는 마지막까지도 매드 위리를 치료하지 못했다. 그러나 강인한 이카리스와 방황하는 테나의 선택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주저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위축되어있던 테나가 숨겨진 진실에 가장 근접했던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는 오해와 갈등, 욕심과 미련 등으로 휘청였지만 결국 한 걸음씩 나아가 빛나는 문명을 이룩하고 있는 인류의 역사와도 닮아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신의 자리를 인간이 대체하며 인본주의 시대가 열린 점을 생각하면, 신을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리기 시작한 MCU의 르네상스는 이제 막 시작점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이터널스>로 꿈꾸기 시작한 MCU 세계관의 확장이 신화의 시대를 넘어 인간의 시대로 접어드는 과감한 상상력으로 발휘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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