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세계 스프린트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권 남자 500m 1차 레이스를 뛴 한 선수의 모습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대단했다. 완벽한 스타트, 혼신의 역주, 그리고 깔끔한 피니시까지 3박자가 모두 완벽했다. 본인도 만족스러운 레이스를 펼쳤다고 생각했는지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 완벽한 레이스를 펼쳤던 선수는 20대 중후반의 전성기가 훨씬 지난 34살의 ‘살아있는 전설’ 이규혁(서울시청)이었다.

그랬다. 이규혁은 20대 중후반의 후배들 못지않은 탄탄한 기량으로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에서 연일 놀랄 만한 성적을 냈다. 그리고 종합 2위를 차지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아쉽게 통산 5번째 우승은 이루지 못했지만 우승에 버금가는 준우승은 충분히 세계 빙상계를 놀라게 할 만하고도 남았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투혼

▲ 이규혁 ⓒ연합뉴스
본인도 인정했을 정도로 이번 대회를 앞두고 이규혁에 대한 전망은 썩 밝지 못했다. 지난해 3월 세계선수권 남자 500m에서 개인 첫 우승을 차지한 뒤에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데다 국내 대회에서조차 '떠오르는 별‘ 모태범(대한항공)에게 밀리기까지 했다. 그렇다 보니 이번 대회에서의 기대감은 이규혁보다 모태범에게 더 쏠렸다.

하지만 이규혁은 맏형다웠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답게 큰 대회에서, 그것도 자신이 무려 4차례나 정상에 올랐던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에서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였다. 34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시작부터 좋았다. 남자 500m 1차 레이스에서 이규혁은 34초33을 기록해 대회 신기록을 세우고 1위에 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1000m 1차 레이스에서도 그랬다. 체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규혁은 1분08초01이라는 준수한 기록으로 4위에 올랐다. 500, 1000m 성적이 고르다 보니 자연스레 중간 성적 종합 1위로 올라섰다. 5회 연속 우승도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그러나 2차 레이스가 아쉬웠다. 1차 레이스에서 보여준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물론 성적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지만 1차 레이스보다 기록은 모두 저조했다. 결국 합산 점수에서 137.000점을 얻어 네덜란드의 슈테판 그뤼튀스(136.810점)에 아깝게 뒤진 종합 2위로 대회를 마쳤다. 또 한 번의 우승을 노렸던 이규혁 입장에서는 무척 아쉬웠을 터였다.

전설들도 못했던 서른넷 이규혁의 입상

그래도 이규혁은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간판스타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해보였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의 실패로 한동안 힘든 시기를 겪은 그였지만 지난해 세계 스프린트, 세계선수권 우승에 이어 새 시즌 스프린트 선수권에서도 준우승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노장의 힘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특히 에릭 하이든, 제레미 워더스푼 등 역대 스피드 스케이팅 스타들조차 30대 중반의 나이에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던 반면 이규혁은 3년 연속(2010, 2011 우승, 2012 준우승) 시상대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스피드 스케이팅의 전설로 주목받는 계기를 또 만든 셈이었다. 이는 종합 3위로 함께 시상대에 오른 모태범에게도 귀감이 될 만했다.

이규혁의 무한도전을 응원한다

올림픽 입상 실패로 “안 되는 것에 자꾸 도전하는 게 슬펐다”면서 고개를 떨궜던 빙속의 영웅. 하지만 그는 이번 대회에서 또 다시 일어섰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계속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하는 그를 두고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꿈꿨던 것이 있다면 끝까지 도전해봐야 하는 것이 베테랑이고, 프로가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규혁의 도전은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며, 끝까지 응원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 나이로 딱 서른 중반에 접어든 적지 않은 나이에 세계 2위에 오른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가 이룬 성과와 값진 투혼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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