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덕수궁의 함녕전(咸寧殿)을 지나 즉조당(卽阼堂)과 준명당(浚眀堂) 뒤쪽을 지나는데 살며시 가을바람이 느껴졌다. 그 순간 소나무를 스쳐온 바람이 궁이 지나온 시간을 거스르게 했다.

덕수궁 안을 걷는 시간은 다른 궁 안을 걷는 것보다 마음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좁은 터 안에 자리잡은 여러 전각들의 간격이 좁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와 함께한 비운의 역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 번 지나는 사계절 마디 마디의 고난과 어려움이 한 해 동안에 수없이 지난 것 같은 근대사의 영욕을 덕수궁은 궁의 주인과 함께 겪은 것이다.

이 궁은 처음부터 궁으로 지어진 것도 아니고,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이 불타버렸기에 피난길에서 돌아온 선조가 임시로 거처하며 업무를 보던 행궁이자 시어소(時御所)였다. 월산대군의 저택과 인근 민가를 합하여 만들었으니 덕수궁은 건립 당시부터 도심의 한복판에서 번잡함을 견뎌야 했다. 짙은 고동색의 석어당(昔御堂)은 임금이 피난까지 갔던 아픔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단청을 칠하지 않은 채 600년을 지나왔다.

덕수궁(德壽宮) (사진=조현옥)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고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할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심어진 살구나무와 벚나무의 화사한 기운이 궁에 가득 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궁은 광해군 10년에 인목대비가 유폐되는 아픔을 끌어안아야 했다.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며 경운궁은 다시 조선 왕조의 궁으로 위치를 찾았고 영조는 양조개어(兩朝皆御) 즉, 두 명의 왕이 즉위하였다는 뜻의 현판을 친필로 내리기도 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였고, 황제 즉위식이 경운궁에서 거행되었다. 고종과 후궁 엄 씨의 소생인 영친왕도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소용돌이치는 근대사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어두운 그림자는 경운궁의 대화재로 이어지고, 을사늑약이 그곳에서 체결되는 뼈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1907년 순종의 황제 즉위 후, 고종이 태황제가 되고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1910년에는 준명당 옆으로 근대적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건립 초에는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930년대에 많이 훼손된 것을 문화재청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본래 황제의 집무실과 사적 공간을 겸한 건물로 지었지만 고종은 이곳을 집무실로만 이용했다고 한다. 침실로는 함녕전(咸寧殿)을 사용했고 그곳에서 승하했다.

덕수궁 석조전(石造殿) (사진=조현옥)

석조전 앞에는 안쪽이 파란색으로 칠해진 분수가 있어 밝은색의 화강석 건물을 돋보이게 하고 멀리서도 건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야가 확보된다. 하얗게 솟는 물줄기를 보니 희망찬 기운이 느껴졌다. 전통 양식과 근대적 양식의 궁이 함께 있으려니 실제 유럽의 궁전 정원처럼 넓고 긴 잔디와 진입로가 없어 아쉬운 맘도 들었다. 하지만 건물 앞의 나란히 선 기둥이 국권과 황실의 위엄을 지키려는 의지를 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후궁 엄 씨마저 세상을 떠나고 1919년 승하하기까지 고종이 내쉬었을 한숨이 함녕전에서 석조전을 오가는 길 나무들 사이에 배어있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 권위 있고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자리에서 그러지 못하고 홀로 삼켜야 했던 황제의 마음. 덕수궁 안에서 흔들리는 황실의 불안한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 우리나라의 풀꽃들이 그들을 위로하며 한편으로는 주권 회복을 위한 의지도 주지 않았을까. 외세의 거센 물결을 타고 이방에서 그곳까지 왔다가 조선의 풀꽃을 밀어내거나 친구가 된 식물들도 있으리라.

그 모든 이야기를 전각의 단청이, 하늘을 향해 들린 처마가 덮고 있다가 한 줄기 바람에 궁을 넘어 실려 보내고, 꽃향기 따라 퍼져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임금님 집과 정원의 사연은 시대적 아픔을 함께하며 그에 귀 기울이는 백성들의 공감의 가지를 타고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 민가로 전해졌을 것이다.

함녕전 옆에 마련된 전시관에서 식물학자이자 세밀화가인 신혜우 님의 식물 표본과 식물 세밀화 전시를 보았다. ‘고종황제의 식물학자가 있었더라면’이라는 가상에서 출발한 <상상의 정원>은 이러한 덕수궁의 숨소리를 담은 듯했다. 석어당에 전시된 가화(假花)인 홍도화(紅桃花)에서는 국권은 약해졌으나 사라지지 않는 왕과 궁궐의 품격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싸리꽃 (사진=조현옥)

전시를 보고 궁의 뒤편으로 돌아가는데, 즉조당 뒤편에서 만난 나비가 몇 장 남지 않은 분홍 꽃잎에 앉아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향기를 품은 꽃의 본질을 찾아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제 덕수궁에 관람 온 사람들에게 이 덕수궁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의미로 남아야 할까.

그때 안타까움과 그리움에 고궁을 거니는 나의 마음을 잡은 것은 싸리꽃이었다. 지난여름 동네 등산로 입구에서 다른 어떤 꽃보다 앞에 서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던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궁의 한구석에서 겸손하게 드리운 가지에 피어있었다.

새끼손톱만큼 작은 타원형의 홍자색 꽃잎이 붉은 댕기를 맨 궁궐 안의 어린 궁녀를 떠오르게 했다. 작고 여리지만 하나하나의 모습은 선명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소중한 생명들. 싸리는 건조하고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 작은 꽃과 부드러운 가지의 생명력이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약해지는 나라의 궁전 뜰을 지키며 꿀을 만들고 척박한 땅에 양분을 만들었을 싸리꽃이 받은 것 없어도 상전을 섬기고 목숨도 바치며 국권을 지키려 한 백성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조전 앞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모란과 달리 열매를 맺어야 할 시간에 이제 겨우 꽃을 피운 싸리는 저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싸리꽃 (사진=조현옥)

식물은 빨리 피고 열매를 많이 맺고 싶다고 주어지는 빛의 양을 욕심내지 않는다. 땅의 양분도 주어진 대로 받는다. 하지만 그들이 지킨 사명의 밑거름 위에 다른 생명이 자라고 숲이 지켜지는 것이다. 사람처럼 공치사하지 않고 준 만큼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 말 없는 희생 위에 이 나라가 지켜졌을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싸리꽃은 여러 종류인데 신혜우 님의 꽃 지도에 의하면 덕수궁 안에는 주로 싸리, 조록싸리와 참싸리가 있다. 싸리의 꽃말 중에는 상념과 사색이 있다고 한다. 타원형의 고운 싸리꽃을 보며 숙명같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평범한 그들의 삶이 가볍게 여겨지던 시절, 그들의 희생 위에 국가는 역사를 지탱해왔고 앞으로도 그 밑거름 위에 국가는 발전해 나갈 것이라 생각된다. 현대의 국가는 그 이름 없는 소중한 생명과 삶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 한 송이의 작은 꽃들이 우리라는 가지 위에서 서로를 이끌며 지켜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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