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 '봄을 맞는 사람들'의 한 장면이다.

이날 방영된 <시사매거진 2580> '봄을 맞는 사람들'은 김 농사를 짓는 어민, 산수유를 파는 할머니,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미팅 준비를 하는 대학 신입생 등의 봄을 맞는 소회를 잔잔하게 담았다. 이중 가장 눈길을 잡아끈 것은 '산수유 파는 할머니', 홍순례(70)씨의 사연이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서 칼국수, 부침개, 두부김치, 산수유 등을 파는 홍순례(70) 할머니는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봄을 맞는 소회를 밝히며 바위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을 병든 다리 절며 절며"

'까마귀' '병든 다리'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등등…. 노랗게 만개한 산수유에 둘러싸여 부르는 노래치고는 어쩐지 스산하다.

사연은 이렇다. 할머니는 60여년 전 '여순사건'을 겪었다. 당시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본 산수유는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일반인들에게 노오란 빛깔의 산수유는 '설렘'이지만 할머니에겐 '악몽'이다.

교과서에 건조하게 나열된, "국방군 제14연대 좌익계열의 일부 군인들이 제주도 4·3사건의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려고 무장봉기한 사건"인 '여순사건'은 홍순례 할머니에게 '꽃다운 고모를 앗아간 사건' '나 조차도 죽었을지 모르는 끔찍한 사건'일 뿐이다.

할머니에게 '좌익' '대한민국 단독정부'와 같은 단어는 관념적일 뿐 구체적 현실감이 없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벌어진 좌익과 우익의 세력다툼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휩쓸려 가야했던 수많은 이들의 소중한 일상. 따스한 봄볕을 만끽하고 싶었던 이들의 '소박한' 권리는 그렇게 무참히 뭉개지고 말았다.

지난 2005년 KBS <일요스페셜> '4·3 뮤직 다큐멘터리-김윤아의 제주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다뤄졌다. 제주 4·3 사건을 가수 김윤아의 내레이션과 함께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 호평을 받았던 프로그램이다. 배경 음악인 김윤아의 노래 '봄이 오면'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슬픈 역사'에 더욱 몰입하게 했다.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 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 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 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중략) 들녘에 시름을 벗고 다정한 당신을 가만히 안으면 마음엔 온통 봄이 봄이 흐드러지고 들녁은 활짝 피어나네."

당시 프로그램을 보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혹자에겐 이 노래가 "봄이 오면 놀러가야지"라는 바람이 담긴 평범한 노래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흔한 노래 가사가 아닌, 제주 4·3항쟁 기간 동안 희생당했던 3만여 명의 소박한 마음 그 자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바야흐로 봄이다. 칼바람을 몰고 왔던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우리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싱숭생숭 마음이 들떠 있다. "주말엔 어디로 벚꽃구경을 가볼까"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스케줄 짜기에 바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가. 어떤 이들에게 봄은 '만물이 약동하는 계절'이 아니라 '피비린내나는 과거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또 과거의 어떤 이들은 이러한 계절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매년 찾아오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봄이지만 일상에 치여 제대로 꽃구경도 못 간다고 구시렁거리지 말고 봄 그 자체를 감사히 여겨보는 것도 좋겠다. 누군가에겐 아픈 '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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