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하략)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시절 교지 『문우(文友)』에 발표한 ‘자화상’이라는 작품이다. 독립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청년 윤동주의 내적 고뇌와 자기 성찰이 담겨 있다.

나는 중학교 시절 이 작품을 접했다. 용돈을 받아 시집이나 시낭송집을 사곤 했는데, 그때 접한 윤동주 시 중에 유독 이 작품이 마음에 와닿았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막연히 어떤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작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어도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며 미워하기도 하고 연민을 느끼는 그 사나이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대학 시절, 이 작품을 썼던 윤동주의 나이가 되었을 때 시대적 요구와 나의 실천력 부족을 갈등하는 속에서 그 우물 속 사나이를 떠올리곤 했다. 이 작품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시적 자아의 내적 갈등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윤동주의 다른 작품처럼 가을바람이 잎에 스치는 듯한 청량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천사의 나팔꽃 (사진=조현옥)

우리가 초·중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일기 쓰기를 강조했다. 어릴 때 잘못을 해야 얼마나 했을까. 그 영향력도 크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일기를 쓰며 도덕적 가치를 키우고 반성과 각오를 다지는 경험을 했다.

어른이 되어 지위가 높아지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까지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진정한 성찰이나 반성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자화상’이라는 작품의 그 사나이처럼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을 보듯 스스로를 차분히 들여다보아야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언제인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유난히 꽃송이가 큰 노랑꽃을 만났다. 멀리서 보아도 신기하게 큰 꽃송이가 눈에 띄어 다가가 보니 마치 거인나라의 나팔꽃 같았다. 이름을 찾아보니 천사의 나팔꽃이라고 한다.

높고 큰 줄기에 매달린 꽃송이가 아래를 향해 있어, 하늘에서 천사가 인간 세상을 향해 나팔을 부는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아래로 늘어진 꽃송이를 보면 금색 트럼펫이 연상되기도 한다.

내 생각에 천사의 나팔은 세상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모습을 닮아 붙여진 이름 같다.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신하와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훌륭한 위인들은 거의 매일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악마의 나팔꽃(사진=조현옥)

악마의 나팔꽃에 대해 알고 나니 더욱 그렇게 생각되었다. 악마의 나팔꽃은 꽃송이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며 잎도 천사의 나팔꽃보다는 뾰족한 모양이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도전하는 모양이라 악마의 나팔꽃이라고 한단다.

천사의 나팔꽃이나 악마의 나팔꽃 모두 꽃잎과 씨앗에 독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나팔꽃처럼 이른 아침부터 오전 중에 피어있다가 오후에는 꽃잎을 오므리는 특성이 비슷하다.

꽃은 그저 씨앗이 뿌려지고 속성대로 위와 아래를 향해 피어났을 것이다. 다만 높이 오를수록 겸손하고 권력을 가질수록 주변을 돌아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꽃의 이름에 ‘천사와 악마’로 나타난 것이리라.

자신의 눈으로 상대방은 바라보기 쉽지만 겸허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살피기 어렵다. 더구나 마음속에서 자라는 교만과 욕심의 뿔은 오직 자신만이 들여다보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천사의 나팔꽃 (사진=조현옥)

분홍색 천사의 나팔꽃이 올해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도 탐스럽게 피어났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악마의 나팔처럼 위를 바라보고 옳은 말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천사의 나팔처럼 세상으로 귀를 열고 들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리고 지위와 권력이 제대로 사용되는지 주변을 돌아보는 눈도 필요하다.

이 모든 마음을 담은 천사의 나팔꽃이 세상 곳곳에 아름다운 향기와 소리를 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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