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마음 깊은 큰언니이거나,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에서 흑백 고전영화 속 공주였던 아야세 하루카는 코로나에 걸린 그녀의 입원 여부를 두고 찬반여론이 오갈 만큼 여전한 일본의 대표 배우이다.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야세 하루카의 2017년작 드라마 <부인은, 취급주의>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상당수 일본 드라마가 자신의 직업이나 현실과 다른 조건에 던져진 주인공의 상황을 모티브로 삼곤 하는데 <부인은, 취급주의> 역시 이런 '아이러니'한 조건이 드라마의 배경이 된다.

아야세 하루카가 분한 이사야마 나미는 조용한 주택가에서 신혼살림을 꾸리고 사는 주부이다. 하지만 결혼 6개월 차 그녀는 벌써 '좀이 쑤신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 007처럼 생과 사를 오가는 작전을 수행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교회 문앞에 버려졌던, 고아였던 나미. 보육시설에서 자라던 그녀는 또래 여자아이를 괴롭히던 남자아이를 제압할 정도로 기개가 남달랐다. 그런 그녀의 능력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모아 동네 '방범대' 같은 역할을 했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특수공작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공작원 일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적들에게 쫓기던 다리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져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웠다. 그리고 평범한 접수 안내원으로 변신한 후 유키(니시지마 히데토시 분)를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아내가 된 특수공작원

일본 드라마 <부인은, 취급주의>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동네 주름잡던 그녀의 '장기'가 어디 가겠는가? 노력해도 양배추 채 하나 제대로 썰지 못하는 젬병인 가사 실력과 달리, 평화로운 마을 곳곳에서 저마다의 '가정 문제'로 신음하는 여성들의 구원에 있어 특수공작원이었던 그녀의 전직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부인은, 취급주의>라는 드라마의 포인트 그 첫 번째는 ‘가정’이라는 신화 속에 신음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2017년 작품임에도 드라마를 보면 일본 사회에서 결혼과 가정의 '보수성'을 확인하게 된다.

남성들을 때려눕히는 데 거침없던 나미이지만 '아내'가 된 후 요리 실력을 늘리느라 고전하고, 정숙하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려 애쓴다.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 현관에 읍하고 기다리는 나미는 남편의 가방을 두 손으로 받고 목욕물을 대령한다. 때로는 전통의상 기모노를 입고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기도 한다.

물론 무심해져가는 남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특단의 조처라고는 하지만, 나미네 집뿐만이 아니라 드라마 속 부부 관계의 전형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내라는 구시대적 스테레오 타입에 고착되어 있다.

일본 드라마 <부인은, 취급주의>

하지만 그러기 때문에 평범한 중산층의 동네 같은 나미가 사는 동네는 특수공작원이 활약을 해야 할 정도로 위태롭다.

첫 번째 에피소드. 나미는 도무지 늘지 않는 요리 실력 때문에 남편이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오는가 싶어 요리를 배우려고 한다. 그런데 요리학원에서 만난 동네 여성, 아직 젊은 주부인 여성의 몸에 구타의 흔적이 보인다.

예민하게 그녀를 주목한 나미와 그녀의 동네 친구 유리와 쿄코. 알고 보니 성인이 되기 전 이미 남편을 알게 된 젊은 주부는 남편의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에게 남편은 세상의 전부였고, 남편은 자신이 아니면 너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식으로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지속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가정'의 일, 거기에 아내를 정신적으로 제압하고 협박한 남편의 철면피한 대처로 가정 폭력의 현실은 쉬이 드러나지 못한다. 결국 해결사 나미가 나서서 폭력적인 남편을 제압하고, 아내를 가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게 된다.

드라마는 평화로운 동네 곳곳에 숨어있는 가정의 ‘그림자’를 에피소드로 삼는다. 포르노 배우였던 전직 때문에 협박당하지만, 포르노 배우가 같은 마을에 산다는 데 더 예민한 주민들. 불륜은 남편이 저질렀는데 내연녀의 자식에게 납치까지 당하게 되는 처지에 이른 주부. 무기력한 삶의 돌파구로 삼은 남자가 알고 보니 제비라 협박을 당하게 되는 등 '취급주의'인 건 전직 공작원인 나미가 아니라, '결혼' 자체인 듯 보인다.

더구나 그런 문제에 동네 주민들은 마을 분위기를 해치는 걸 먼저 걱정하고, 남의 사생활이란 이유로 관심을 끄려고 한다. 결국 해결사를 자처한 나미가 '비밀' 지킬 것을 담보로 하여 나서는 수밖에 없게 된다.

특수공작원이 필요한 동네

일본 드라마 <부인은, 취급주의>

흥미로운 건, 전직 특수공작원인 나미를 중심으로 한 유리와 쿄코의 우정어린 활약이다. 요리 못하는 나미와 함께 요리학원에 나가게 된 동네 친구. 그녀들은 나미와 함께 동네 부인들의 어려움에 발 벗고 나선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벗이 되어주고, 협박 당하는 이웃을 위해 불침번을 선다. 마을 주민들이 불편한 이웃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려 할 때 그녀들은 용감하게 나서서 이웃의 편이 된다. 그저 친해서 편이 아니라, 협박당하는 약자를 도와줘야 한다고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다.

나미도 유리도 쿄코도 모두 ‘가정', 그리고 현숙한 아내라는 프레임 속에 자신을 꾸겨 넣고 살아가려 애쓴다. 하지만 특수공작원인 전직, 아니 그보다 본질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앞장세웠던 정의감에 다시 한번 동네 해결사로 나서게 되는 나미처럼, 유리나 쿄코도 동네 부인들의 사건을 통해 무심하거나 마마보이인 남편의 아내라는 작은 울타리를 넘어 자신들을 발견해 나가게 된다.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에 기반한 결혼이 가진 모순, 특히 일본사회가 가진 보수적 가정의 프레임 속에 잠재된 문제들을 <부인은, 취급주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다. 또한 그 문제해결 과정을 통해 주인공 나미를 비롯한 세 여성은 자아를 찾고 '여성' 혹은 '부인'이 아닌, 한 사람의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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