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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와 찌르레기’- 딸 잃고 남편마저 정신병원행, 릴리는 멈추지 않았다[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1.10.04 13:32

[미디어스=이정희] 가끔은 살아가는 게 막막해지는 순간이 누구에게라도 있을 것이다. 새삼스레 톱니바퀴에서 튕겨져 나온 것처럼,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며 갈 곳 모르는 어린아이 심정이 될 때가 있지 않을까? 

아마도 릴리네 부부 역시 그랬을 것이다. 요람에 누운 갓난 케이티를 두고 아기방 벽에 칠하며 릴리와 남편 잭(크리스 오다우드 분)은 케이티가 자라서 가지게 될 직업을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케이티는 비건 정육점 주인도, 발 전문 의사도 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릴리 부부의 곁을 떠났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부부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 스틸 이미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남겨진 사람은 그 아픔을 감당하지 못한 채 자책하게 된다. 릴리의 남편 잭도 그랬다. 내가 편하게 아침까지 자버리고 않고 케이티를 들여다봤다면? 게다가 그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로 돌아가 남의 아이들을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견딜 수 없었던 잭은 스스로 목숨을 거두려 했고 그 시도가 실패하자 정신병원에 자신을 가둔다. 병원에서 주는 약을 꼬박꼬박 먹지 않고 모아놓는 잭. 그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하루아침에 딸을 잃고, 남편마저 극단적인 선택에 이어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황. 말 그대로 설상가상의 상황이 릴리의 처지다. 과연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릴리(멜리사 맥카시 분)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남편을 면회할 수 있는 매주 화요일이면 조퇴하고 남편을 만나러 간다. 그녀의 일상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 남편이 회복되어 예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정신병원에서 이루어진 집단상담에서도 릴리는 자기 부부에게 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 포스터

하지만 과연 그럴까? 변함없이 일상을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마트 동료들은 종종 허공을 응시하며 '정신줄을 놓은 듯'한 릴리를 우려한다. 그리고 일에서도 자꾸 빈틈이 생긴다. 정신병원에 있는 건 남편인데 남편의 상담사는 릴리에게 상담을 받아보라며 자신이 아는 상담사를 소개해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상담사가 소개해준 이는 '인간을 상담하는 일'을 이제 그만하고 싶어서 '수의사'가 된 래리다. 당연히 상담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릴리와 찌르레기>에서 정신병원에 있는 건 남편 잭이지만 정작 '시한폭탄'처럼 보이는 건 릴리다. 하지만 릴리는 꾸역꾸역 현실을 버티어 나간다. 남편의 상담사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이 방에 대한 언급을 하자 집으로 돌아와 아이 방을 정리한다. 잡초가 가득했던 마당도 홀로 씨름을 하며 베어내고 새로이 텃밭을 마련한다. 상담사도 찾아간다. 

찌르레기와 릴리의 전쟁 

그렇게 안간힘 쓰며 현실을 버티는 릴리에게 강력한 방해꾼이 등장했다. 바로 릴리네 마당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꾸민 찌르레기이다. 영화에선 아이를 상실해 가정이라는 보금자리의 위기를 맞이한 릴리네 부부와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려는 찌르레기의 사투가 맞물린다.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 포스터

상담하러 찾아간 수의사 래리 덕에 릴리는 자신을 공격하는 찌르레기의 습성을 알게 된다. 새 중에서도 자기 영역에 대한 ‘소유권'이 가장 강력한 찌르레기. 그래서 릴리가 텃밭을 일구려 하자 찌르레기는 그걸 침범이라고 생각하고 몸을 던져 공격한다. 덕분에 릴리는 자꾸 '피를 본다.' 남편마저 자신의 뜻과 다르게 행동하며 홀로 집을 지키는 것이 버거워지던 릴리. 하지만 뜻밖에 등장한 '마당 점거' 찌르레기로 인해 적막하던 일상의 균열이 생긴다. 

찌르레기와의 전쟁 과정에서 릴리는 릴리의 딸 케이티의 양말 한 짝까지 가져다 새끼들의 둥지를 꾸린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새끼를 지키려는 찌르레기의 공격적인 모습은 이제는 빈둥지가 되어버린 가정을 지키려는 릴리의 안간힘과 역설적으로 대비된다. 

새끼를 지키려는 엄마 찌르레기와 이제 더는 엄마가 아닌 릴리의 사투. 그 둘은 다를까? 영화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려는 안간힘이라는 점에서 둘을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남편 잭은 토로한다. 릴리가 미웠다고. 아이를 잃고 상실감에 자신은 삶의 방향을 놓쳤는데 변함없이 일상을 지속해나가는 릴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런 릴리였기에 남편은 정작 릴리를 놓을 수 없다. 결국 릴리의 정성에 남편은 삶을 놓았던 자신을 추스른다.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 스틸 이미지

릴리는 말한다. 아이를 뱃속에 아홉 달 품고 있었던 건 자신이라고. 자기라고 슬프지 않겠냐고. 아이를 잃었지만 릴리에게는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가정이 '찌르레기'처럼 지켜야 할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실의 슬픔에 주저앉는 대신, 굳세게 일상을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녀에게 정신병원에 있어도 남편 잭은 삶의 지푸라기였고, 남편은 그런 릴리를 지푸라기 삼아 다시 삶에 의지를 갖게 된다. 

퇴원을 앞둔 잭은 걱정한다. 세상에 나가 다시 힘들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정신과 의사는 답한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거라고.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뿐이라고. 

우울의 치료제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대다수 심리학책이 내린 결론도 다르지 않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일에 우리는 불가항력이다. 단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그 삶의 현장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는 것뿐이다. 

멜리사 맥카시를 앞세운 영화는 상실의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릴리'라는 인물을 통해, 그리고 그 인물을 빗댄 '찌르레기'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운다. 일상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상실의 늪에서 한 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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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평론가 이정희  5252-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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