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멋진 하루>는 영화 같다. ‘돈 갚아’라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첫 대사도 그렇지만 멋진 하루라는 제목을 향하는 과정이 그야말로 영화다. ‘영화 같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제작의 3단계를 알면 더 이해가 빠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시나리오/캐스팅/로케이션 등을 준비하는 프리 프로덕션. 촬영 현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제작 단계인 프로덕션. 편집/CG/마케팅 등의 후반 작업이 포스트 프로덕션이다.

대다수가 관심 있고 궁금해하는 건 프로덕션 과정이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 그리고 스태프들의 긴장감은 언제나 흥미로운 소재이다. 프로덕션을 다룬 영화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 준비단계의 어수선함을 매력적으로 담아내는 작품들이 가끔 등장한다. 포스트 프로덕션을 다루는 영화들은 굉장히 드물다. 지루하고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탓이다. 그런데 <멋진 하루>는 굳이 비유하면 포스트 프로덕션을 다룬 영화 같은 영화다.

‘돈 갚아’라는 첫 대사가 나온 배경은 이렇다. 어느 겨울의 토요일 아침. 희수(전도연)는 경마장에서 병운(하정우)를 찾아낸다. 둘은 1년 전에 헤어진 연인이다. 희수는 병운에게 빌려 간 돈 35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한다. 사업이 망해서 전세금까지 뺀 병운은 여행 가방 하나로 친구 집을 떠도는 신세다. 병운은 희수의 차에 타고 서울을 누비며 그동안 알고 지낸 여자들에게 돈을 빌려 희수의 돈을 갚는다.

영화 <멋진 하루>

명배우들을 위한 포스트 프로덕션

우선 <멋진 하루>는 배우들의 다음 행보에 영향을 주었다. 일단 전도연에게는 이 영화의 선택이 과감한 도전이었다. <밀양>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며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에 작은 규모의 영화를 택한 게 모두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가질 수 있는 폭과 넓이를 모두 확장하는 계기가 바로 <멋진 하루>였다.

이전까지 전도연을 수식하는 말은 ‘멜로의 여왕’이었다. 영화 데뷔작 <접속>에서 시작해서 <약속>, <해피엔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공주>, <내 마음의 풍금>, <스캔들>, <너는 내 운명>까지. 이때까지가 전사(前事)의 비중이 거의 없는 현재진행형 사랑이었다면 <멋진 하루>부터는 사연 있는 여자로 거듭나게 된다. 똑같이 사랑에 죽고 사는 인물이라도 그럴 만한 이유를 궁금하게 만드는 다층적인 캐릭터들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정우에게도 <멋진 하루>가 미친 영향이 크다. 하정우는 <추격자>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은 이래로 쉼 없이 연기 변신을 하며 폭넓은 캐릭터를 소화해왔다. 그러나 ‘너무 능글맞아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남자’라는 기본적인 뼈대는 병운에서 완성됐다. 전도연이 아닌 희수는 노력한다면 찾아볼 수 있겠지만, 하정우가 아닌 병운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배우와 캐릭터가 딱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배우 하정우에게도 큰 자산이다.

영화 <멋진 하루>

서울을 위한 포스트 프로덕션

경마장에서 출발한 희수와 병운은 서울 곳곳을 누빈다. 성수동, 약수동, 부암동, 문래동 등. 단순히 보기에 아름다운 장소만 나열됐다면 서울시 홍보영상이 됐겠지만, 동선은 막무가내로 짜여있지 않다. 초반에는 희수가 불편한 장소로 이동한다. 돈 많은 사장님의 건물 옥상, 지인의 오피스텔 등.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편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희수가 일부러 쳐놓은 마음의 벽이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한편 <멋진 하루>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최고의 로드 무비로 꼽힌다. 실제로도 서울에서 손꼽히는 길이 영화에 담겼다. 물론 영화가 영향을 주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은 없지만, 희수와 병운이 지나치는 장소들은 모두 현재 부동산 가격이나 유행에서나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핫스팟이다. 개봉한 지 10년이 넘은 영화가 남긴 서울의 정취만 따라가도 관객들이 멋진 하루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시에 근사한 서울이 품고 있는 불안함도 쉽게 옅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자주 찾던 칼칼한 갈치조림을 잘하던 식당은 불과 1년 사이에 폐업했다. 파혼하며 괜찮은 직장을 떠난 희수는 경력단절을 걱정하며 비정규직으로 80만 원을 버는 삶을 두려워한다. 이혼과 사업실패로 무일푼이 된 병운은 주거 불안에 대한 걱정이 없는 듯 보이지만, 폭등하는 부동산을 바라보는 서울시민에게는 병운의 떠돌이 생활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멋진 하루>

삶의 여진을 갈무리하는 포스트 프로덕션

<멋진 하루>의 가장 값진 포스트 프로덕션은 메시지다. 영화는 이별한 연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이 없다. 채무만 남은 깔끔한(?) 둘의 관계는 단 한 가지의 질문만 던진다. 희수는 진짜 돈이 필요해서 왔을까. 영화를 보면 ‘아니다‘라는 심증이 강하게 남는다. 돈이 없다지만 자가용도 몰고 다니고 내비게이션도 달았다. 결정적으로 ’만나면 욕이나 한 바가지 하고 싶었다‘는 고백도 한다.

그렇다면 희수는 도대체 왜 병운을 찾았을까. 주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와이퍼‘에서 질문의 단서를 조금씩 찾아볼 수 있다. 와이퍼는 영화 초반부터 등장한다. 희수는 경마장에 세워둔 자동차 와이퍼에 껴있는 수많은 전단을 신경질적으로 치운다. 그중에 몇 장은 찢어지는 바람에 와이퍼에 끼어버리고 만다. 설상가상 소나기가 내릴 때는 주차해 둔 차가 견인되는 바람에 비를 쫄딱 맞고 대중교통을 탄다. 영화 중반에 고장 난 와이퍼를 병운이 고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비가 그치고 영화가 끝날 때가 돼서야 와이퍼가 고쳐진다. 물론 고친 사람은 병운이다.

어쩌면 희수의 마음은 이미 고장 난 와이퍼 같지 않았을까. 살다 보면 예고 없이 내리는 비에 온몸이 흠뻑 젖기도 하고 폭우가 쏟아지는데 와이퍼가 고장 나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가 잦은 장마가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평생 비만 내리는 일은 없다. 분명 맑은 날이 더 많을 것이고 누군가 고쳐둔 와이퍼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다음에 비가 오는 순간일 것이다. 와이퍼도 필요한 순간에 누군가 고쳐놓으면 된다. 돈은 필요한 사람이 쓰면 된다며 돈 빌리는 데 거리낌이 없는 병운의 말처럼.

영화 <멋진 하루>

희수가 병운을 만나러 온 이유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350만 원이 급하게 필요했을 수도 있고 욕만 하려고 갔을지도 모른다. 정말 어쩌면 미련이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헤어진 연인에게 큰 기대를 해봐야 별것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지도 않다. 중요한 건 희수가 병운을 만나고 함께 돈을 빌리러 다니며 변한 게 있다는 사실이다. 병운의 친구에게 희수가 험한 말을 듣자 ’내가 왜 이 꼴을 당해야 하냐‘며 순수한 짜증을 내지만, 나중에 병운이 사촌 형에게 험한 말을 들을 때는 ’그 꼴을 당하고도 화나지 않냐‘는 애증으로 바뀌는 태도처럼 말이다.

삶도 그렇다.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들이 한참 진행 중일 때보다,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에 찾아오는 여진이 삶을 더 크게 흔든다.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은 앞선 일들의 여진일지도 모르겠다. <멋진 하루>의 결정적 포스트 프로덕션은 바로 이 부분에서 빛이 난다. 갈무리 못 한 여진으로 삶이 요동칠 때. 속 편하게 무책임한 병운의 변함없음에 익숙하게 짜증을 내며 혼란한 마음이 잠시라도 안정되고 위안을 얻는다면, 그날을 멋진 하루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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