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5일 킹스컵대회 태국과의 1차전을 펼칠 올림픽축구대표팀선수들이 13일 대회가 열릴 태국 방콕 라자망갈라 국립경기장에서 몸을 풀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축구는 아시아에서 부러워할 정도의 스펙을 갖고 있는 '아시아 축구 강국'입니다. 그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이 바로 월드컵 본선 진출 기록입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첫 출전한 뒤 1986년부터 2010년까지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뤘던 한국은 2002년 4강, 2010년 16강 무대를 밟으며 아시아 축구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월드컵에서의 좋은 성적 덕에 한국 축구와 월드컵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축구가 월드컵 무대를 밟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월드컵 출전보다는 지금은 다소 생소한 아시아 지역 국제 축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 더 가치 있게 여겨졌습니다. "고국에 계신 시청자(또는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되는 코멘트에 귀 기울였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태국 킹스컵,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 그리고 국내의 대통령배 축구대회 이른바 박스컵 등 3가지 국제 대회에 열광하고 주목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우승만 하면 마치 세계를 제패한 것 같은, 월드컵 우승 이상으로 기뻐했습니다.

그 대회 가운데 태국 킹스컵에 한국 축구가 모처럼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축구대표팀이 15일부터 21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2012 킹스컵에 출전해 실력을 점검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번 킹스컵에는 한국 올림픽대표팀을 비롯해 태국, 덴마크, 노르웨이 등이 출전하며 풀리그 방식으로 치러 우승팀을 가리게 됩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실전 점검을 통해 런던올림픽 최종예선 전력을 담금질할 계획이지만 축구 올드팬들 입장에서는 한국 축구의 킹스컵 출전이 꽤 반갑게 여겨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 축구를 키운 킹스컵-메르데카배, 그리고 박스컵

킹스컵은 1968년 이후 모두 40차례나 치러진,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동남아시아 대표 축구대회입니다. 이 대회와 한국 축구의 인연은 무척 깊습니다. 첫 출전한 1969년 2회 대회부터 3연속 우승을 달성한데 이어 1973년부터 1975년까지도 3연패를 거두며 7년간 6번 우승의 쾌거를 이뤘습니다. 차범근 감독이 이끌었던 프랑스월드컵 축구대표팀 역시 1998년 대회에서 이집트를 꺾고 우승을 거두는 등 우승만 9차례를 거둔 대회입니다.

국가대표팀, 올림픽팀, 상비군, K리그팀, 실업팀 등 한국 축구와 관련한 거의 모든 팀이 거쳐간 유일무이한 국제대회가 바로 킹스컵입니다. 1977년에는 국가대표 상비군이 출전해 공동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0년대에는 K리그팀들이, 1993년에는 실업 선발팀이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1998년 대회 이후 14년 만에 출전한 이번 대회에 올림픽팀이 출전하게 됐으니 한국 축구 성인팀으로는 모든 팀이 이 킹스컵을 거쳐 간 셈입니다.

킹스컵 만큼이나 대단한 흥미를 끌었던 대회는 바로 메르데카배였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기념해 창설된 메르데카배는 지금까지 40번을 치렀는데 주최국 말레이시아와 더불어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11회) 대회로 남아있는 국제축구대회입니다. 성인대표팀이 참가했던 1978년까지 무려 8차례 우승을 거둬 그 당시 한국 축구가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국제대회로 알려져 있는데, 1957년부터 시작돼 상대적으로 역사도 오래 되다보니 아시안컵보다 더 높은 비중을 갖고 대회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킹스컵, 메르데카배에 견줄 만 한 큰 대회를 국내에서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1971년부터 한국에서도 큰 국제 축구 대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박대통령배 쟁탈 국제축구대회' 이른바 '박스컵'이 그 대회입니다. 1971년에 첫 대회를 연 뒤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를 거쳐 코리아컵이 열린 1999년까지 치러진 이 대회는 안방에서 마음껏 보고 즐길 수 있었던 사실상 유일한 국제 대회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1970년대에만 5차례 우승을 차지했으며, 특히 1976년 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는 1-4로 뒤진 후반 차범근의 기적 같은 해트트릭으로 4-4 무승부를 거둔 '전설적인 경기'가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꾸준하게 대회를 치르면서 쌓은 국민적인 관심, 열기 덕에 2002 월드컵 유치에도 영향을 준 대회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 3대 대회 출전'이 그래도 소중한 이유

축구의 세계화가 이뤄지고, 전체적으로 축구를 보는 눈, 수준도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킹스컵, 메르데카배, 박스컵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져 갔습니다. 박스컵, 대통령배는 2002 월드컵을 기점으로 사라졌고, 메르데카배는 1990년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걸으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킹스컵이 태국인들의 강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대회로 오늘날까지 치러지고 있지만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한동안 묻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회를 통해 한국 축구가 성장하는 과정을 밟고, 좋은 경험을 선사해줬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월드컵보다는 수준이 낮았을지 몰라도 이 국제 대회를 통해 한국 축구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꾸준하게 전력 향상을 위한 준비를 다 했습니다. 이회택, 김호, 차범근, 허정무 등의 스타가 발굴됐던 것도 이 대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대회들에서 얻은 국제 대회 경험, 그리고 다져왔던 도전 정신이 결과적으로는 한국 축구가 세계로 나아가는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한국 축구'의 이름으로 홍명보호 올림픽 축구대표팀이 태국 킹스컵에 출전합니다. 오래전 선배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한국 축구의 진정한 꿈을 찾아가는 발판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팬들도 킹스컵이라는 대회에 간만에 열광하고 즐긴다면 월드컵, 아시안컵 못지않은 흥미진진한 국제 대회로 다가올 것입니다. 40-50년 전 순수하게 열광하고 환호했던 그때 그 모습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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