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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은 자기연민의 늪에 빠진 주인공을 구원할 수 있을까[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1.09.08 15:35

[미디어스=이정희] “아버지 나는 실패한 것 같아.”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아버지에게 JTBC <인간실격>의 주인공 부정(전도연 분)이 말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걱정한다. “회사에서 뭔 일 있냐?”

그녀는 아버지가 말하는 그 '회사'라는 출판사에서 짤렸다. 현재 한 젊은 여배우의 집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중이다. 부정은 답한다. “그런 일이 아냐, 그냥 내가 못나서”. “너는 내 자랑인데”라고 아버지는 말하지만, 부정은 한결같다. “나 그냥 너무 나빠진 것 같애.”, 아버지는 그런 부정에게 “유산 때문인가”, 또 걱정을 얹는다. 부정은 고개를 젓는다. “아닌데 뭔가 어딘가부터 꼬여 버린 인생 때문에.”

JTBC 1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인간실격>

그렇다. JTBC <인간실격>의 주인공 부정의 인생은 그녀의 말처럼 꼬여 버렸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대필 작가가 되었고, 이제 그 일조차 여의치 않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짤렸고, 아이도 잃었다. 가사 도우미 신세다. 연하의 남편과는 교감이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시어머니와는 앙숙 관계다. 

모처럼 드라마로 돌아온 허진호 감독의 작품답게 감각적인 영상 속에, 부정은 도무지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내보이지 못한다. 겨우 그녀가 잡은 건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은 강재의 팔이다. 

세상과 불협화음을 빚는 부정 

JTBC 1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인간실격>

드라마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처럼 주인공의 '자의식' 강한 독백으로 서막을 연다. 소설 <인간 실격>은 인간 사회에 태어나 그 속에 동화되어 살아보려 애썼지만 끝내 '실패'를 승인하고 만 주인공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결국 자살시도 다섯 번 만에 성공(?)하고 만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고백록적인 소설은 결국 주인공이 인간 세상에 아듀를 고하며 마무리된다. 

그런 소설의 모티브를 그대로 따온 듯, 드라마 속 부정은 세상과 불협화음을 낸다. 시어머니와 한바탕하게 된 계기가 된 건 경찰서에서 온 출석요구서였다. 이유는 악플. 여전히 아내가 '널널한 출판사'에 다니는 줄 아는 남편은 그런 아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듯 부정은 드라마 초반 등장하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세계 속에 웅크려 '실패'를 선언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버지를 옆에 두고 눈물 흘리는 부정을 보는데 또 한 명의 '부정'이 떠오른다. 그녀처럼 모든 것을 잃고 가사 도우미를 하던 한 여성, 바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인공 찬실이(강말금 분)다. 

가진 것 없지만 복도 많다는 찬실

'아, 망했다. 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라는 영화의 헤드 카피처럼 영화 속에서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던 찬실이는 감독이 하루아침에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직업을 잃는다. 직업을 잃었으니 당연히 돈이 없다. 돈이 없는 그녀는 결국 산꼭대기 할머니네 집 문간방으로 쫓기다시피 이사를 가게 된다. 이사는 했지만 호구지책이 급선무다. 결국 그녀는 아는 후배 여배우네 집  가사 도우미를 자처한다.

아이를 잃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남편도 없으니 더 낫다 할 것도 없다. 집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고 도우미 신세라는 점에서 부정과 겨룰 만하다. 그래도 부정에겐 팔이라도 잡아 끌 강재(류준열 분)이라도 등장하지만, 찬실이 앞에는 한겨울 흰 런닝 팬티 바람의 자칭 '장국영'이라는 귀신이 어른거린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찬실이와 부정, 누가 더 불행할까? 상황으로 보자면 두 여성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은데, 이들의 태도가 천지 차이라 비교가 된다. 

돈도 안 되지 않냐는 부정에게, 그래도 폐지라도 주울 수 있는 게 어디냐는 아버지 앞에서 부정은 '실패'라는 말을 꺼낸다. 글을 쓰고 싶었는데 대필 작가가 되었고, 그 일도 맘대로 안 되어 젊은 여배우 집 가사 도우미를 하는 게 실패일까? 

부정의 실패, 그 원인은 다 밖으로 향해 있다. 물론, 작중 그녀의 도우미 일이 호구지책인지, 아니면 여배우를 향한 모종의 복수극인지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드라마는 부정은 도우미나 할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 애쓴다. '도우미'나 할 사람은 따로 있는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찬실이는 자처해서 후배 여배우네 도우미가 된다. 프로듀서였던 사람이 자신의 작품에 출연했던 여배우네 집 도우미라니. 하지만 찬실이는 참 열심히 일한다. 밥도 해놓고 집도 깨끗이 치우고. 그녀가 성실하게 돈도 안 되는 영화를 해왔듯이, 그렇게 도우미 일도 한다. 

영화 속 찬실이 앞에 등장한 자칭 '장국영', 그렇게 귀신이 등장할 만큼 찬실이는 피폐해졌다. 그런데 그 피폐함 속에서도 찬실이는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낸다. 도우미 일도 하고, 주인집 할머니 글도 가르쳐드리고 함께 밥도 먹는다.

JTBC 1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인간실격>

가진 것 하나 없는 찬실이를 보고 영화 속 OST에서 이희문은 타령조로 '복도 많지, 복도 많지'를 되풀이한다. 무슨 복? 독립영화로 소규모로 개봉했던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젊은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스터디셀러가 되었었다. 왜 이 시대 젊은이들은 모든 걸 잃은 찬실이에게 열광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부정이처럼 실패라고 해도 될 상황 속에서도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문구처럼, 찬실이는 참 의연하게 자기 삶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찬실이는 어설픈 연애조차 실패해도 누구를 탓하지 않는다. 자신이 산꼭대기 단칸방으로 쫓겨나도, 후배네 집 술병이나 치우고 있어도 단 한번도 자기 삶의 실패를 누구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런데 부정을 보다 보면 그녀가 불쌍해지는 대신, 그럼에도 그녀가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을 헤아리게 된다. 빨간 목도리를 꽁꽁 동여맨 부정은 자기는 너희와 다르다는 듯, 남편에게도 시어머니에게도 팔짱을 건다. 그런 그녀가 폐지 줍는 아버지에게 지나가듯 도우미나 할까 하고 말을 건넨다. 도우미나 할 사람은 따로 있을까? 글줄이나 써야 성공인 걸까? 그런 부정과 '허세' 어린 삶을 살아가는 강재는 묘하게 닮았다. 

그녀는 여전히 폐지라도 주울 수 있는 게 어디냐는 아버지 말에 담긴 삶의 엄정함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 연민의 늪에 빠진 주인공을 드라마 <인간실격>은 구원할 수 있을까. 날마다 혹독하게 삶과 싸워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부정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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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평론가 이정희  5252-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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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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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하나 2021-09-10 10:52:15

    제가 <인간실격>을 보면서 부정의 눈물에 공감할 수 없었던 부분을 제대로 짚어주셔서 속이 다 후련해지네요. 분명 분위기를 잡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어딘지 모를 불편함과 부정에게 반감이 드는 건 왜 일까 싶었는데, 단순 드라마 홍보를 위한 복붙기사가 아니라 기자님의 통찰을 보여주셔서 무척 공감했다는 의사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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