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 한국 축구를 결산할 때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여자 축구의 대단했던 선전, 남아공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 성남의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투혼 등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정반대였습니다. 좋은 일보다는 마음을 무겁게 한 일이 더 많았습니다. 국민 스포츠로 더욱 거듭나려 했던 2011 한국 축구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실망감을 안겨주며 위태위태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나마 그런 가운데서도 나타난 희망적인 소식들은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는 힘이 됐습니다.

한국 축구에 큰 상처 입힌 승부조작-축구협회 행정력

올해 한국 축구의 명예를 실추시킨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승부조작 사태입니다. 몇 년 전부터 챌린저스리그(K3), 대학, 고교 축구 등에서 버젓이 행해져왔던 승부조작은 결국 한국 축구의 최상급리그 K리그에서도 선수들 사이에 벌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충격을 줬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단순히 호기심에 했을 것으로 봤지만 시간이 갈수록 현역 국가대표 선수, 스타플레이어 등이 잇따라 거론되고 실제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수 출신 브로커, K리그 현직 감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수십 명의 현역 선수가 시즌 도중 사법처리돼 나서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리그 중단론이 확산되기도 했고, K리그에 대해 실망했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 갑작스레 경질된 조광래 전 축구대표팀 감독 ⓒ연합뉴스
이 승부조작 사태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 또 있었다면 바로 조광래 국가대표팀 감독의 갑작스런 경질이었습니다. 상반기까지만 해도 '만화 축구'라는 색다른 시도로 재미를 봤던 조 감독은 8월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0-3으로 참패한 이후 내리막길을 걷다 결국 지난달 브라질월드컵 3차예선 레바논과의 원정경기에서 1-2로 지면서 고개를 떨궜습니다. 하지만 경기가 치러진 지 3주 뒤에 이뤄진 급작스런 감독 경질이어서 이에 대한 많은 의혹들이 제기됐습니다. 특히 감독을 선임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축구협회 기술위원회가 아닌 축구협회 회장단에서 경질을 결정해 물의를 빚었고, 이 과정에서 축구협회 스폰서들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다는 말이 제기되면서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경질이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설상가상 축구협회는 새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도 부적절하고 매끄럽지 못한 행정력으로 질타를 받았습니다. 기술위원회가 추천하고 새 감독 후보를 협상하는 식이 아닌 축구협회장과 기술위원장이 사전 접촉한 후 통보하는 식의 절차를 무시한 감독 선임으로 황당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최강희 전북 감독이 선임되기는 했지만 축구협회의 시대착오적이고 독단적이며 무능한 행정력은 한국 축구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카타르 클럽 알 사드가 수원 삼성, 전북 현대와 잇따라 만나 '비매너 축구', '침대 축구' 등의 키워드를 남기며 K리그에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승부조작 사태 등으로 인한 문제로 K리그는 내년 AFC 챔피언스리그 본선 티켓을 4장이 아닌 3.5장으로 축소해서 얻었고, 이는 한국 축구 외교력, 행정력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 AFC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경기 도중 관중을 폭행하고 있는 카타르 알 사드 선수들 (사진:김지한)
야심차게 도입하려 했던 K리그 승강제는 스플릿시스템 도입으로 새로운 시도를 꾀했습니다. 그러나 12월 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강등팀 숫자, 발전기금, 가입금 문제에 대한 시-도민 구단들의 반발로 합의를 이루지 못해 내년 초 한국 축구의 '뜨거운 이슈'가 될 것임을 남겼습니다. 또 지난해 사상 최고 한 해를 보냈던 여자 축구는 U-16, U-19, 국가대표팀 모두 각급 월드컵, 올림픽 티켓을 따내는데 실패하며 다시 '아시아 2류'로 전락했습니다. 이렇게 돌이켜 놓고 보면 한국 축구에 우울한 소식들이 많았던 한해였습니다.

온갖 악재 속에 나왔던 희망적인 성과들

그렇다고 아예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알릴 수 있는 계기도 있었고, 감동적인 소식도 분명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축구를 사랑한 팬들의 힘이 컸던 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하반기 부진으로 빛이 바랬지만 1월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의 선전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짧은 패스 축구, 공격 축구를 바탕으로 이전 아시안컵과는 다르게 매 경기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비록 목표했던 우승에 실패하고 3위에 만족했으며 박지성, 이영표가 이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했지만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국가대표팀에 신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 전북 현대 (사진: 김지한)
전북 현대가 K리그의 큰 별로 떠오른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전북은 '닥공(닥치고 공격)'이라는 특색 있는 축구를 앞세워 K리그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결국 2년 만에 K리그 우승을 차지해 명문클럽으로 거듭났습니다. 좋은 성적만큼이나 전북의 홈경기장인 전주월드컵경기장은 서울, 수원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관중이 들어찼으며, 특히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는 4만여 관중이 입장해 역대 결승전 최다 관중 기록도 세우며 지방팀의 K리그 흥행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전북의 우승에 큰 기여를 한 이동국은 롤러코스터같은 행보를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대회 최우수선수(MVP), 도움상 등을 수상하며 K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MVP, 득점상, 도움상, 신인상을 모두 수상한 선수로 남았습니다.

'영록바' 신영록이 K리그, 한국 축구의 '기적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신영록은 5월8일, K리그 대구 FC와의 홈경기 도중 심장 부정맥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50여일 동안 일어나지 못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하지만 팬과 동료들의 간절한 기도, 염원이 하늘에 닿은 듯 기적처럼 일어났고 그는 몰라보게 나날이 건강해진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K리그 시상식에서는 시상자로 나서 자신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제주 유나이티드 트레이너에게 감사패를 수여해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신영록 덕분에 정말 많이 울고 웃었던 한 해였고, 그래도 새로운 희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박주영, 지동원, 구자철 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유럽 무대에 진출했고, '영원한 캡틴박' 박지성은 2010-2011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역대 두 번째로 선발 출장해 풀타임 활약하며 한국 축구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우승은 실패했지만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K리그 팀이 세 팀이나 8강에 올라 또 한 번 동아시아 최강 리그라는 것을 보여준 것도 의미 있었습니다. 온갖 악재, 사건 속에서도 팬들이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꾸준하게 경기장을 찾아 K리그 최초 300만 명 관중을 돌파한 기록도 흥행의 새로운 씨앗을 틔운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반성했던 한 해, 내년에는 꼭 비상하라

올해는 정말 악재가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오래되거나 잘못 나온 싹을 잘라내는 계기가 됐고, 새롭게 발전하는 데 어떤 점을 고쳐야 하는지 우리의 실상을 잘 파악하는 계기가 됐기에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드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곳곳에 희망적인 일들이 나왔던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게 했습니다.

▲ 내년에는 K리그 대흥행과 함께 최강희호의 의미있는 비상을 기대한다. (사진: 김지한)
2012년은 올림픽의 해, 그리고 월드컵 최종예선이 있는 해입니다. 더불어 프로스포츠 최초로 승강제가 도입되며, K리그가 출범한 지 30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올해와 같은 나쁜 일보다는 지난해 이상의 좋은 일이 더 많은 한국 축구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한국 축구는 다시 힘차게 뛸 것입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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