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동네 공원에서 저녁 산책을 하며 새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마가목 잎이 늘어선 야트막한 언덕을 조금 올라가니 분홍빛 꽃잎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중앙에 왕관 모양의 노란 꽃술을 품은 다섯 장의 꽃잎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 같다.

“넌 누구지? 어디서 본 듯한데, 아, 너 최용신 문학관 앞에 있던 그 꽃이구나.”

해당화는 이렇게 지난여름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사진=조현옥

긴 장맛비가 멈춘 작년 유월의 어느 날, 최용신 기념관 앞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상록수역 근처에서 근무하게 된 나에게 친구는 그곳을 안내하고 싶다고 했다. 상록수역을 지날 때마다 ‘심훈’의 「상록수」를 떠올리며 한번 가봐야겠다 마음만 먹고 가보지 못한 채 여러 해가 지난 터였다. 친구는 학생들과 문학 답사를 하던 곳이라며 퇴근 후 거기서 보자고 했다. 반드시 교회가 있는 쪽으로 올라오라고 했는데, 위치를 몰라 상록수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계단 위쪽에 기념관이 보였다.

계단 가까이 가니 한쪽에 작은 샘이 보였다. 소설 '상록수'의 배경이 된 샘골(泉谷:천곡)이라는 이름답게 아직도 수질이 좋은 우물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샘 옆에 있는 거목이 그늘을 만들어 주어 물의 신선도를 유지해 주는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니 흰 벽에 낮고 넓은 창이 있는 최용신 기념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회색 구름이 걷히지 않은 하늘은 검은색 기와지붕을 이고 가로로 길게 서 있는 건물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용신 선생이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을 깨우치고 돌보며 사랑했던 그분의 마음이 그곳에 오롯이 담겨 있는 듯했다. 장맛비로 수분을 충분히 머금은 나무 향이 아직도 그곳에 어려있는 가르침과 배움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부모 잃은 아이처럼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지켜 줄 그 어떤 힘도 없던 시절, 배고프고 배움도 고프던 우리 민족에게 삶에 대한 꿈과 위로가 있던 곳이다.

창 앞에는 두 개의 아이 인형이 있었다. 하나는 교실을 들여다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뭐라고 외치는 모양이었다. 교실을 들여다보는 인형은 안에서 수업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외치는 인형은 ‘배워야 산다’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하는 것 같아 생동감을 주었다. 두 인형을 바라보니 정겹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밖에서 보기에 단층으로 보이지만, 지하까지 2층 구조로 된 기념관에서 학생들을 위한 체험 학습 프로그램이 이루어진다고 친구는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날은 코로나19로 기념관 내부 관람이나 체험 학습은 중지되었다는 안내표지판과 함께 문은 닫혀있었다. 기념관 내부에 있는 최용신 선생의 유품이나 자료를 보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샘골 교회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진=조현옥

1976년 안산이 신도시로 지정되며 철거될 위기에 처했던 이곳이 여러 사람의 청원에 의해 공원지구로 계획 변경되며 이 교회 자리도 유지된 것이다. 최용신 선생이 직접 강의했던 무인가 건물이었던 천곡 강습소는 이듬해 인가를 얻어 신축했는데, 지금은 1990년대에 지어진 현대식 건물이 있고 교회 앞에 예전 교회의 주춧돌 7개가 보존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그때 사용했던 종탑이 보존되어 있었다. 최용신 선생이 실제로 근무했던 곳이자 소설 상록수의 배경인 샘골 교회와 그때 사용했다는 교회 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다.

1931년 20대 초반의 최용신 선생이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어린 처녀가 무엇을 하겠느냐며 그녀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무료 강습소였던 천곡 강습소의 인가를 얻어 110명까지 늘리고 농가 부업을 장려하며 유실수(有實樹)도 나누어 주는 등, 실제적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다 보니 사람들도 믿고 따르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학용품을 사기 위해 밭에 나가 농사를 돕기까지 했으니 선생의 진심이 통한 것이다.

배움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 대상으로 이어졌고, 눈에 띄는 지역 발전까지 이루었다고 하니 문화와 복지까지 아우르는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보다 나은 농촌계몽 운동을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난 최용신 선생은 각기병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샘골로 돌아온 선생은 농촌계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다가 1935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유언 중에는 천곡 강습소를 계속 경영해 달라는 것과 강습소 부근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것이 있었다.

친구의 설명을 들으며 교회와 종을 둘러본 나는 둘 다 교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가르침과 계몽에 헌신했던 선생의 사명감을 되새겨 보았다. 선생의 묘역으로 향하며 친구의 설명을 통해 놀랍고 감동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용신 선생의 약혼자인, 소설 속 박동혁으로 등장했던 김학준 선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용신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다른 분과 결혼을 했는데, 아내의 허락을 받고 사후에는 최용신 선생의 묘 옆에 나란히 묻혀 있다는 것이다. 주권을 잃은 나라에서 사명을 위해 결혼을 미루었다가 세상을 떠나서야 함께하는 두 애국자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절절한 사랑이며 사랑마저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미루었던 숭고한 연인들이다.

고작 중학교 때 기고한 글에서 최용신 선생은 교육받은 여성들이 농촌의 변화에 헌신하고 사회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남보다 더 배웠으니 당연히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특권의식은커녕, 혜택받은 자로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책임을 갖고 실천하는 삶을 산 것이다. 고향이 함경도인 선생이 사명감 하나로 머나먼 경기도 안산까지 와서 계몽의 불꽃, 변화의 불꽃을 지피고 헌신하다 사랑하는 연인과 조용히 잠들어 있다.

사진=조현옥

참으로 진실하고 아름다운 두 사람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인의 묘역 주변에서 하얀 잎을 펼치고 서 있는 개망초마저 두 사람을 추모하는 것처럼 경건해 보였다. 스물다섯 짧은 생을 간신히 넘기고 다음 해 1월에 세상을 떠난 최용신 선생 이야기를 하며 내 머릿속에는 열사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을 떠난 학우가 떠올랐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강원도로 농촌 봉사활동을 떠났다. 같은 마을로 배정되어 구박 십일을 함께 지내며 알게 된 친구였다. 그 후 우리 동아리 방에 와서 커피도 마시고, 오며 가며 알고 지낸 그 친구가 그해 가을 동아리 연합회 회장 후보로 나왔다. 후보 등록 사진에 단아하게 머리를 묶고 두루마기를 입고 있던 사진이 그 이듬해 그녀의 영정사진이 된 것이다. 당시 학교에 다녔던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는 뼈아픈 영상으로 가슴에 새겨졌다.

1987년 6.29 선언으로 독재 정권은 옷만 갈아입었다. 대학로나 학교 근처에서 상주하던 정복 경찰은 사복 경찰로 바뀌었을 뿐, 시대는 더 음울해졌다. 시위가 있으면 최루탄보다 가스는 적지만 더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는 물대포를 많이 사용했다. 결국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 아래 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신하는 노동자와 학생들이 줄을 이었고, 변절한 어느 작가는 학생들에게 감상적인 죽음의 행렬을 멈추라는 절망적인 괴론을 쓸 정도로 시민들에게서 민주화를 위한 외침이 외면당할 때였다.

그때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시위를 나갔던 김귀정 열사는 그날의 토끼몰이식 강력한 진압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동행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열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몇 달간 백병원에 있던 시간, 우리는 서로 몰랐지만 그도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곧 열사의 추모시집을 복간하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다시 기념관 앞쪽으로 나오니 높이가 일 미터쯤 되는 찔레 잎을 닮은 무성한 초록 잎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 하늘거리는 분홍 꽃잎. 한지를 접어놓은 듯 얇은 꽃잎이 다소곳이 오므리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지난여름 죽변 해변에서 댓잎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던, 이미자의 노래비가 있던 소이작도에서도 잠시 보았던 꽃, 해당화였다.

어렸을 때 바닷가는 가보지도 못하고 합창부에서 배워 흥얼거리던 노랫말, ‘해당화가 고옵게 핀 바닷가에서’처럼 해당화는 바닷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가까이 가서 꽃을 자세히 보니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선명한 빛깔의 꽃잎과 꽃술이 단아한 모습의 김귀정 열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조현옥

최용신 선생의 사진은 보지 못했지만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살았던 그분의 마음이 저렇게 야무지고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며 해당화를 마음에 담고 기념관을 떠났다. 동행한 친구가 처음에 말했던 교회 옆 계단 쪽으로 내려오니 길이 운치 있었다. 내려와서 샘골 교회 건물을 기념관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느낌도 색다르고 좋았다. 친구는 이곳과 연결하여 제부도까지 동문회 여러 친구와 함께 답사하면 좋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기념관에 있던 해당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여러 자료를 보았다. 소설 상록수에는,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의 사랑 고백 장면에서 해당화가 등장한다. 박동혁이 손을 잡자 채영신이 슬그머니 손을 빼며, 이 바닷가에는 왜 해당화가 없느냐고 묻자 동혁이 해당화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붉게 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아무래도 작품 속의 소재는 실제 주인공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작가의 취향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심훈 선생이 해당화를 좋아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그래서인지 심훈 선생은 해당화, 해당화, 명사십리 해당화야 하고 부르며 바닷가에 핀 붉은 해당화를 노래했고 가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용운 선생도 해당화가 피기 전에 온다는 임(독립)을 기다리는 마음을 시로 썼다. 시의 앞부분에서 해당화가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한 임이 봄이 지나도록 오지 않자, 봄이 너무 일찍 왔나 하며 애가 타는 시적 자아의 모습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마침내 해당화가 피니, 아름다운 꽃잎이 이별과 시련의 증거가 되는 역설적인 마무리가 인상 깊은 작품이다. 한용운 선생의 작품 속에서 임은 조국의 독립을 의미하니 민족 전체의 운명이 달린 일이기에 이별은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되고 만다. 개인적으로는 한용운 선생의 해당화가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많은 꽃 중에 한용운 선생은 또 왜 그런 작품에 해당화를 등장시켰을까.

사실, 해당화는 물이 잘 빠지고 햇살 좋은 바닷가나 산기슭 어디서나 잘 자란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친근한 꽃이었던 것이다. 배앓이나 이뇨, 해열 작용에 좋은 식물들이 담장 옆에서 자라며, 활짝 핀 꽃은 백성들의 웃음을 지켜주고 뿌리나 잎, 열매는 생명을 지켜준 식물들이 많지 않은가. 무엇보다 최용신 선생의 고향인 함경남도의 두남리는 명사십리와 해당화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기념관 안에는 이러한 자료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날 기념관 내부를 들어갈 수 없는 덕분에 한용운 선생의 해당화까지 살펴보게 되었다.

결국 훌륭한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였던 심훈 선생은 고향을 떠나와 먼 곳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최용신 선생을 작품에서 섬세하게 배려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최용신 선생의 삶도 아름다운 꽃일 수 있기에 시로도 해당화를 노래했으리라.

궁녀로 차출된 누이를 그리며 죽어간 동생이 죽어간 자리에 피었다는 전설 때문인지 꽃말은 '그리움 또는 여인의 숨결'이라고 한다. 양귀비는 술에 취한 자신의 모습을 해당화에 비유했다고도 하니 해당화의 아름다움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인정했던가 보다. 해당화의 이미지는 화려함이나 즐거움보다는 아련한 그리움이 깃든 꽃으로 보인다. 향이 진해서 향수의 원료로도 사용되고 열매는 비타민 C와 폴리페놀이 풍부하다고 한다.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그 쓰임도 유용하다.

주권을 빼앗긴 조국에서 계몽운동을 하며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최용신 선생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스물다섯에 세상을 떠난 열사 김귀정, 서른여섯 짧은 생애를 독립운동하다 투옥되면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긴 심훈 선생의 삶이 모두 아름다운 해당화의 향기처럼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짙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오늘 산책길에서 만난 해당화를 보며, 이제 작가의 길에 들어선 내게 해당화는 어떤 그리움과 사명을 전해 준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그 꽃을 전설처럼 슬픈 기다림이나 애달픈 꽃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소망과 의미 있는 삶의 자세를 일깨워 주는 꽃으로 이곳에서 계속 피어나기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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