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랑종>, <곡성>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한국의 나홍진 감독과 태국의 호러영화를 대표하는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뭉친 오컬트 영화 <랑종>. 어마어마하게 무섭다는 시사회 후기와 영화계 관계자들의 리뷰 덕분에 전례 없이 상영관의 조명을 켜고 관람하는 겁쟁이 상영회까지 진행되며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런데 개봉 이후 일반 관객들에겐 만족스러운 공포 영화라는 평보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불쾌한 영상물이라는 평을 더 듣고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랑종>은 <곡성>에서 무당으로 등장한 일광(황정민)의 전사(前史)를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 전사뿐 아니라 몇 가지 설정에서 드러난 <곡성>과의 유사점을 갖고 있다. 성별도 나이도 다르니 동일인은 아니겠으나 <곡성>에서 일광이 어떤 이유로 외지인(쿠니무라 준)과 한패가 되어 거짓말로 사람들을 현혹해 파멸로 이끄는지 상상하는 게 <랑종>의 또 다른 포인트 중 하나인데, 관객들의 악평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일단 <곡성>과의 유사점을 살펴보자. 두 영화 모두 카메라는 중요한 소품이다. <랑종>은 아예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곡성>에서 일광이 외지인과 한패라는 게 드러나는 건 영화 후반부다. 절대 현혹되지 말라던 일광은 종구(곽도원)의 가족이 참변을 당한 뒤 나타나 카메라를 들고 유유히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일광이 타고 온 차 안에서는 그동안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이 가득 담긴 박스가 발견된다. 공교롭게도 밍이 악령에 완전히 빙의된 후 뱉은 유일한 인간의 언어는 카메라맨을 습격하며 남긴 “내가 대신 찍어줄까”이다.

악귀와 토착신의 대결도 비슷한 양상이다. <곡성>의 외지인은 사악한 주술로 죽은 자를 좀비로 환생시키고 마을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려 살인사건을 유도한다. 이에 맞서는 토착신 무명(천우희)은 종구에게 외지인의 정체를 알려주고 직접 쫓아내려고 노력하며 궁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랑종>의 배경인 이산 지역에는 ‘바얀’이라는 토착신이 있다. 님(싸와니 우툼마)은 바얀신을 믿는 무당이고 그의 힘으로 밍(나릴야 쿤몽콘켓)에게 벌어지는 의심스러운 일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비록 영화에 직접 나타난 무명과 달리 님의 퇴마의식을 통해 그 능력이 표현되는 정도지만 말이다.

영화 '랑종'의 한 장면

<곡성>과 <랑종>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랑종>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며 서사적인 약점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주제 의식부터 그렇다. <곡성>은 미지와 무지 사이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냈다. 미지(未知)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이다. 이유도 원인도 없는 악이 재난처럼 인간을 덮친다. 일광의 말처럼 악이 인간에게 ‘미끼를 던진 것’이다. 낚싯줄에 어떤 게 딸려 올라올지는 모른다. 왜 하필 곡성인지, 왜 하필 어리고 죄 없는 효진이가 악의 눈길에 포착됐는지는 마지막까지 알 수 없다.

무지(無知)는 악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종구는 무명에게 묻는다. 왜 내 딸이 그런 일을 당해야 하냐고. 무명은 ‘그 아이의 아비가 죄를 지었다’고 답한다. (외지인을) 의심하고 죽이려고 하고, 결국 죽여버리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종구는 내 딸이 먼저 아팠다고 항변하지만 안타깝게도 효진이 아픈 게 처음부터 외지인의 짓이라는 증거는 없다. 결국, 이 모든 사단은 인간이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과관계에 의한 결과라는 의미다.

영화 '곡성'의 한 장면

영화 내내 종구는 미지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무지에 관해서는 불신한다. 곡성 지방에서 연이어 등장하는 참사에 대한 영화 내의 공식적인 설명은 독버섯에 대한 환각작용이다. 그러나 종구는 이 말을 의심하고 외지인을 찾아가 위협을 가하며 스스로 미끼를 문다. 반면 종구를 도우려는 무명의 조언은 불신한다.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조언을 듣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 종구가 마주치는 건 칼을 든 효진이다. <곡성>의 공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니지만, 끝까지 ‘뭣이 중한지’ 알 수 없다는 짙고 깊은 무력감에서 피어오른다.

<랑종>에서 종구처럼 고군분투하며 무지를 탐구하는 건 님이다. 밍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님은 처음에 비얀신이 신내림한 줄 착각하고 다음으로 자살한 오빠의 원혼 때문이라고 오해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아산티야 가문에 내려진 저주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런데 님이 퇴마를 하루 앞두고 사망한 채로 집에서 발견된다. 예상치 못한 반전은 서사구조를 뒤흔든다. 영화의 중심축이 빙의의 대상인 밍에게로 갑자기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겹도록 이어진 7일간의 CCTV 화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밍은 이미 인간성과 지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다.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 되어버린 밍은 스스로 사건을 해결한 능력이 부재한 것은 물론이고 분석이나 탐구의 주체도 될 수 없이 그저 순수한 악을 뿜어내는 하나의 개체에 불과하다. <곡성>으로 따지자면 주체적으로 악의를 갖고 움직인 외지인이나 일광이 아니라 온전히 저주의 피해자가 된 효진에 가까운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랑종'의 한 장면

뼈대부터 잘못 설계된 미지와 무지의 대비

이 과정에서 무지를 탐구해야 할 님의 역할은 마지막까지 관찰자로만 남아야 할 제작진에게 떠맡겨진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한 <랑종>에서 제작진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되어 있다. 오로지 사건을 카메라에 담는 것뿐. 악귀에게 빙의된 퇴마사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투철한 직업의식(?)은 갑자기 떠맡게 된 탐구자의 역할을 억지로 수행시키려는 감독의 궁여지책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랑종>의 뼈대를 이루는 미지와 무지의 대비도 설계 단계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샨티아 가문에 내려진 저주의 원인은 선대로부터 쌓인 업보로 설명된다. 밍의 증조할아버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수많은 사람을 죽인 탓에 돌에 맞아 죽었고 방직공장을 운영하던 할아버지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공장에 일부러 불을 질러 많은 직원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결국 보험사기가 들통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화재로 희생당한 이들의 원한을 풀어준 것 같지도 않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난 뒤. 다큐멘터리 제작진도 모두 죽어 누구의 시선인지 모를 카메라는 폐공장 한구석에 있는 저주 인형을 클로즈업한다. 오랜 시간 방치된 게 아니라 방금 만들어진 것 같은 의미심장한 이 저주 인형은 추모의 과정이 생략됐다는 추리를 강력히 뒷받침하며 동시에 영화의 숨겨진 주제와 많은 관객이 느낀 불쾌함의 뿌리를 캐낸다. 아샨티아 가문을 파멸시킨 악귀의 행동이 사실은 악인에 대한 철저한 인과응보라는 것 말이다.

공포 영화를 비롯해 어떤 영화든 무조건 권선징악의 해피 엔딩으로 끝날 까닭은 없다. 하지만 과잉금지의 원칙을 한참 넘어 연좌제로 달려 나가며 ‘죄짓고 살지 말라’는 악귀의 피비린내 나는 교훈을 듣기 위해, 도망갈 수 없는 극장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듯이 40분 동안 유혈이 낭자한 영상을 억지로 시청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 역시 드물다. 그래서 <랑종>의 진짜 비극은 영화가 끝난 뒤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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