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은 자서전 마이 웨이(My Way)에서 당시 이용수 기술위원장에 대해 "항상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대표팀이 원활하게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기술위원장, 기술위원회의 역할이 없었다면 그만한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한축구협회에 소속돼 있는 기술위원회는 세계 축구 흐름에 맞춰 대표팀이 극강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좌하고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입니다. 때문에 대표팀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압력, 어려움을 막아주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역할을 펼쳐야 합니다. 축구협회에 소속돼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독립 기구 형태로 운영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그 때문에 꾸준하게 제기돼 왔습니다.

하지만 2011년 12월, 이 기술위원회는 사실상 '기능 정지' 상태에 빠졌습니다. 축구협회 수뇌부의 입김에 모든 것이 좌우되다보니 기술위원회는 허수아비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술위원회의 수장,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할망정 각종 문제만 일으키며 대표팀을 수렁으로 빠지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 축구를 전반적으로 관장하는 협회의 중요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의 아마추어보다 못한 처신은 그렇게 연일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무(無)소신-무원칙, 시작부터 불안

▲ 축구 대표팀 감독 밝히는 황보관 기술위원장 ⓒ연합뉴스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이회택 전임 위원장의 뒤를 이어 지난달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많은 의문 부호가 달렸습니다. 올 시즌 K리그에서 FC 서울을 맡아 두 달 만에 경질되는 전력을 갖고 있는데 한국 축구 기술위원장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빠르고 의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황보 위원장이 일본 J리그 오이타 강화부장,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행정력이 있고, 공부하는 지도자라는 특성 때문에 전임 위원장에 비해 전문성 있게 기술위원회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보 위원장은 1달도 되지 않아 오락가락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레바논과의 브라질월드컵 3차예선 패배 직후 가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황보 위원장은 "발전적인 방향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분석하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면서 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에 신뢰하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그러다 회장단 내 불신임 분위기가 조성되자 급작스레 태도를 바꿨고 기술위원회가 구성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감독을 경질하는 수순을 이어갔습니다. 레바논전에 대한 기술위원의 공식적인 평가도 없었던 상황에서 단순히 회장단 의견에 휘둘린 결과로 감독 경질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초유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대한축구협회를 지탱하는 정관을 무시하고 소신도 없이 그저 '위에서 하라는 대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기본도 없고, 논란만 일으키고...

이후에도 황보관 위원장의 아마추어적인 처신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술위원회를 꾸렸지만 단 두 차례 만에 감독 선임을 했다는 것, 그것도 순수하게 기술위원들의 토론 없이 사전에 정한 감독 후보를 일방적으로 기술위원들에 통보하는 형식의 수순을 밟은 것입니다. 황보 위원장은 이에 대해 "우리는 그저 추천만 했다"고 했지만 사전에 조중연 축구협회장, 황보 위원장이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을 찾아 감독직을 요청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습니다. 통상 기술위원회에서 감독 후보군을 2-3명 정도로 압축한 뒤 해당 감독을 찾아가 요청하는 순서로 감독을 정했는데 이번에는 그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얘기입니다. 기술위원회의 기본적인 기능 자체를 완전히 망가뜨렸고, 일부 기술위원은 처음부터 이에 불만을 터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능함, 무지함의 극치를 보여준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황보관 위원장은 최강희 감독을 최종 후보로 선임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계약 기간은 아직 모른다. 전혀 논의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대표팀 감독을 정하면 언제까지 계약 기간을 할 지 정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애매모호한 대답 때문에 역시 논란이 됐고, 그 다음날 최강희 감독 기자회견에서 "내 임기는 2013년 6월까지다. 이 부분은 직접 이야기했다"고 말해 전날 황보 위원장이 말한 것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미 감독 선임 원칙에서 '3차예선, 최종예선, 본선의 3단계 국가대표 감독 선임 방향을 지키겠다'며 선임한 감독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지 않는 말을 해 논란이 됐는데 선임 감독 계약 기간 문제부터 제대로 해결책을 보여주지 못하며 오히려 더 큰 문제만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쇄신 없으면 허수아비 행보 계속 될 것

감독 선임만 갖고도 워낙 많은 문제를 일으키다보니 그야말로 축구대표팀 감독, 축구대표팀의 권위,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소모했고, 결과적으로 1차 목표인 월드컵 3차예선 최종전 시간만 코앞에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3차예선뿐 아니라 세계 축구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파악하면서 대표팀 전력 강화에 보탬이 되는 자료를 전달하는 기본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걱정이 들 뿐이었습니다. 우려를 넘어 심각한 수준의 부적절한 처신을 보여준 기술위원장입니다.

문득 황보 위원장이 취임 일성으로 "2022년까지 세계 10위에 들겠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실력으로 세계 10위에 오르는 게 아니라 말로만 10위에 오른다고 허언에 그치지 않을까 대단히 걱정됩니다. 황보 위원장 스스로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직책에 맞는 자기 쇄신과 반성, 그리고 대표팀 발전을 위한 확고한 의지와 소신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황보 위원장의 '허수아비' 행보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한국 축구의 위상만 깎아먹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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