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배가 고팠던 일곱 살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동네 교회에서 '양식'을 나눠 준대서 아이는 동생의 손을 잡고 갔다. 먹을 걸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배고픈 아이의 손에 놓인 건 '마음의 양식', 책이었다.

교회에서 아이에게 준 책은 <인어공주>였다. 그 책을 읽고 이해가 안 된 아이는 엄마에게 물었다. '거품이 된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그러자 엄마는 “공주로 실없게 살던 년이 알지도 못하는 놈한테 미쳐서 형제 부모 다 버리고 딴 세상 가서 몸 버리고 마음 버리고 고생만 드럽게 하다가 인생 종쳤다는 얘기”라고 답한다.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엄마의 해석에 따르면 다 그런 식이다.

그 해석은 곧 엄마의 삶이었다. 엄마가 불쏘시개로 쓰는 문학관련 서적, 그건 아버지의 책이었다. 서울대를 나온 아버지. 하지만 이젠 그저 술주정뱅이일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커녕, 아이들이 선물을 받고 싶어 달아놓은 양말에 코를 푼 아빠는 엄마를 때렸다. 자신의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게 엄마 탓이라는 듯.

tvN 새 월화드라마 <너는 나의 봄>

그래서 아이는 꿈을 꾸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자상한 이웃집 아빠가 자신의 아빠였으면 하고, 아니 알고 보니 자신이 사실은 이웃집 아이였으면 하고.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검은 고양이>였다. 책 속에서 '검은 고양이' 덕에 아내를 죽인 남자의 범죄는 벌을 받게 되었다. 아이에게 '검은 고양이'는 '희망'처럼 여겨졌다.

이웃집 아빠가 찾으러 오지도 않고, 아빠의 폭력도 그치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어느 날 밤 피가 묻은 손으로 아이와 동생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런 어린 시절을 지나 아이는 이제 34살이 되었지만, 그녀 방에 검은 고양이 액자가 걸려있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일곱 살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나를 몇 번이나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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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보웬은 '가족'을 인간의 정서와 관계를 분석하는 기초적 단위로 여겼다. 즉 사람들은 개인으로 살아가는 듯하지만, 대부분 가족에게서 ‘심리적’으로 분리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며 혹은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은 가족관계에서 얽히고설킨 인간적 딜레마를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마치 고리에 걸리듯 우리는 가족 안에서의 역할, 부모로 인해 헤어나오지 못한 심리적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어른이 된 자신의 발목을 잡은 가족이라는 관계의 늪을.

보웬의 주장처럼, 다정(서현진 분)은 어머니를 따라 일곱 살 시절 집을 떠나 왔지만 여전히 일곱 살 시절 그곳으로 돌아간다. 즉 자기 삶의 실패를 아내 탓으로 돌리며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스스로 '해소'하지 못한 다정은 아버지와 비슷한 수준의 남자들과의 만남을 되풀이한다.

일곱 살 시절 어머니가 해석해준 그림책 속 이야기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재해석했듯, 여전히 어머니의 삶을, 아버지의 폭력을 극복하지 못한 다정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자꾸만 부모의 모습을 재연한다.

‘나는 나를 몇 번이나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야 하는 걸까?'라고 자조하는 다정. 가까운 친구는 그녀에게 대놓고 '똥촉'이라 말한다. 이제는 어엿한 호텔 컨시어지 매니저. 그러나 여전히 남녀관계에 있어서만은 자신의 가족이 가진 '원죄'의 그림자에서 한 발도 헤어나지 못한다. 알코올 중독자는 물론 그녀에게 손을 벌리는 남자에 거짓말쟁이, 양다리, 최악의 경우를 매번 갱신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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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카페가 있는 99빌딩으로 이사 온 다정은 이제는 달라질 거라고 자신감을 내비친다. 그런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스토커처럼 퇴근길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가 노란 꽃 한 송이를 내민다. 시들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꽃이 싫다 하자, 이번엔 종이로 만든 노란 꽃을 내민다. 시들지 않을 거라고. 하다 못해 꽃을 만든 종이를 메모지로 써도 되지 않겠냐는 그 남자 채준(윤박 분)에게 어느덧 다정의 마음이 흘러간다. 퇴근길,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다정의 앞에서 그렇게 자상한 미소를 띤 그 남자를 다정과 같은 건물 정신과 의사 영도(김동욱 분)는 ‘소시오패스’라고 부른다. 영도의 환자가 되는 바람에 다정에게 채준의 실체를 밝힐 수 없는 영도는 그저 그를 만나지 말라고 하고, 그런 속도 모른 다정은 이유를 묻고, 이유를 알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한 발을 내민다.

이번에도 다정이 쓰레기통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하는가 싶었는데, 드라마는 2회 만에 채준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어느덧 채준에게 마음을 연 다정은 채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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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돌아온 <풍선껌>의 이미나 작가, <너는 나의 봄>의 다정 역시 <풍선껌>의 행아처럼 자신의 가족적 아픔을 '소라게'처럼 짊어진 인물이다. <풍선껌>의 행아는 연이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모님으로 인해 죽을 만큼 아파도 병원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천애고아인 자신의 처지를 마음속 깊이 아로새긴 채 역으로 매우 밝게, 주변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러나 자신의 진짜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던 '상처받은 아이'였다.

<너는 나의 봄>의 다정 역시 지나치게 씩씩하다. 그렇게 남자들에게 상처 받았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게 아니라, <풍선껌>의 행아처럼 아픔을 마음속 깊숙이 숨겼을 뿐이다. 그렇기에 '정착하는 걸 두려워하고, 영혼을 갈아 넣는 관계에 두려움을 가진다’는 정신과 의사 영도가 말에 자기도 모르게 멱살을 잡는다.

<풍선껌>의 행아처럼 여전히 일곱 살 시절의 상흔을 품고 있는 다정, 드라마는 그 다정의 상처로부터 시작된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미나 작가의 <너는 나의 봄>은 여주인공의 묵은 상처를 드러내며, 컸지만 크지 못한 '어른이'의 이야기를 연다. 심리학자 보웬은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 독립시켜 자율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가족 치료 이론'의 과제라고 말한다. 다정은 해묵은 가족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오랜만에 돌아온 이미나 작가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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