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당이 유럽 선거에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과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해적’이란 이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어, 해적당이 주장하는 정당 프로그램 내용과 그 배경 및 의미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화 논리와 함께 전 세계로 확산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유화(Liberalization), 사유화(Privatization) 및 탈규제화(Deregulation)를 내세우며 공기업과 공공재를 민영화하고, 다국적기업들의 자유로운 이윤추구를 위해 모든 국가의 규제를 완화해 기업의 이윤확장을 보장해 주었다. 더불어 기존의 복지정책이 시민들의 나태함을 불러왔다는 비판과 함께 세계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시민들이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발휘했으며, 유럽에서조차 사회보장제도의 후퇴는 필연적임이 강조되어 왔다.

하지만 이로 인해 벌어진 빈부의 격차에 대해선 시민들의 높아지는 불만에도 각국 정부는 함구로 일관해 왔다. 심지어 미국에서 시작된 2007/8년 세계경제(금융)위기에도 국가경제 파탄을 막기 위해선 금융위기 원인제공자들인 기업들을 살릴 수밖에 없다는 급박함을 들며 은행 및 금융기관들에게 퍼부어진 자본은 어마어마했다. ‘기업의 이윤은 사유화하고 경제적 손실은 사회화’해 결국 시민들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한 사건들을 세계시민들은 어이없이 목격해 왔던 것이다.

▲ 12월 12일 ‘점령’ 집회포스터. 미국의 “월 스트리스를 점령하라” 운동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기업들의 비윤리적 행위와 방만 운영이 빚어낸 금융위기에도 월 스트리트의 보너스 파티가 보여주듯이 책임자는 어디에도 없고, 기업들은 오히려 금융파탄에 대한 대가를 정부의 자금수혈로 톡톡히 보상받았다. 시민들의 척박한 삶은 아랑곳없다는 자본주의의 가장 천박한 모습에 세계시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또한 고용의 유연성이란 이름으로 추진되어 온 기업 살리기 정책으로 비정규직을 늘려 삶의 불안감을 고조시켜 왔지만 그 해결책은 미비했다. 그간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요구되어 왔던 허리띠 졸라매기 작전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고, 세계시민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분노하고 있다. 99%의 반란으로 일컬어지는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운동은 1%의 금융경제적 탐욕의 상징인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세계 금융시스템규제와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시민들은 탐욕적 자본주의에 돌을 던지며 1%가 아닌 99%의 시민을 위한 참민주주의 정치를 촉구하고 있다.

반면에,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미명하에 시민들의 사생활 침해와 사이버상의 개인정보에 대한 국가검열은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상반된 흐름은 일반 시민뿐 아니라 개방된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는 인터넷 뉴미디어 세대에겐 당연히 숨 막히는 국가의 폭력이며, 이는 어느덧 시민의 목을 조르는 형국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투명해야 할 정부는 자신들의 정보는 기밀에 붙이고 공개하지 않는다. 정보의 자유를 외쳤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도 시민에게 공개해야 할 정보들도 비밀리에 유지해왔다. 또한 정치권력과 기업의 비리를 감시해야 할 주류언론들은 감시기능의 역할을 외면한 지 오래다.

작년 위키리크스(WikiLeaks)가 내부고발자들이 유출한 각 정부기관 및 군부와 다국적 기업들의 기밀정보들을 줄줄이 공개하면서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각 정부가 숨겨왔던 또 계속적으로 숨기려 했던 충격적인 사건과 비윤리적 행위들이 일거에 폭로된 것이다. 시민들의 눈은 가려진 채, 각 정부와 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덮어 버렸고, 시민들의 정당한 ‘알 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음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정보의 자유와 정보공개를 통한 정부들의 투명성 요구가 세계시민들 사이에서 이슈로 떠올랐으며, 이것이 또한 해적당이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특히, 인터넷이 가져다 준 정보공유의 편리함이 기업의 이윤추구에 장애물로 인식되면서 저작권법이 국제적으로 표준화됨과 동시에 더욱 강화되어 왔다. 영화 및 음악 DVD와 CD 불법복제로 지칭되던 해적판에서 인터넷의 등장과 더불어 다운로드가 쉬워졌고, 결국 음반 및 오락산업 기업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서 저작권 강화를 요구해 왔다. 결국 무역관련지적재산권, 즉 TRIP(Trade-Related Intellectual Property, 1994)가 국제무역기구인 WTO에 의해 추진되는 등 저작권이 국제적으로 강화되었다.

국내 경우를 예로 들면, 저작권은 한미FTA 체결로 더욱 강화된다. 저작권자의 직접적인 권리인 저작인격권(저자의 사망과 함께 소멸)과 저작재산권(사후 50년까지) 이외에 저작인접권 즉, “저작물의 실연, 녹음 및 방송을 통하여 저작물의 배포, 전파에 기여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기 위해 인정된 권리”가 50년에서 20년이 더 연장된 70년으로 강화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작자를 통해 이익을 남기는 사업자들의 권리가 훨씬 늘어난다는 것이다. 저작권 강화를 이유로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척 하지만 결국엔 기업들의 권리보호를 강화시켜주는 꼴이다. 일부에선 한류의 확산으로 한국의 문화콘텐츠 보호를 위해 저작권 강화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최소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한국인들이 미국문화를 사모하는 것만큼 미국시민들이 한류 드라마, 영화 및 소위 K-Pop을 일상적으로 즐기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저작권, 즉 카피라이트(Copyright) 강화와 표준화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저작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이 일어났다. 저작권 즉, 카피라이트는 창작물의 이용을 허가 또는 금지하는 방식으로 저작자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반면에, 카피레프트는 저작자의 허가 없이도 창작물의 자유로운 이용 및 제2의 창작을 허용하는 동시에 협업을 권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창작물은 이미 이전 세대가 창작한 것을 바탕으로 생산된 것이므로 한 개인 및 단체나 기업의 소유만이 아니라 공공의 소유가 되어야 하며, 이것이 결국에 인류의 문화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스 필자의 칼럼 ‘저작권 따져보기 3’ 참조). 특히 해적당은 저작권을 사후 70년까지 보장하는 것은 뉴미디어시대에 합당하지 않으며, 저작권 보호기간은 5년이면 충분하다는 견해다.

해적당들은 저작권뿐만 아니라 공업(산업)재산권의 일부인 특허권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허가 저작권과 마찬가지로 산업국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대부분 경제산업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개발도상국들의 산업발전 기회를 가로막는 요인이기도 하다. 특히 생물학적 특허의 일부인 유전자 특허를 기업에게 허용하고 있어 많은 문제를 야기해 왔다. 창작물이 아닌 자연물에는 특허가 허용되지 않음에도 유전자 특허가 특정 기업에게 주어져 인간의 유전자 통제뿐 아니라 유전자 실험독점권도 소유하게 된다. 또한 의료약품 개발에 필요한 특정 식물의 성분도 특허로 인정되면서 인도나 아프리카 등 세계지역의 원주민들이 오래 전부터 이용해 온 식물들까지 기업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생존권까지 위협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그동안 많은 이권이 산업국의 기업들에게 돌아간 반면에, 세계시민들에게는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목으로 개인정보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사생활침해가 서슴없이 자행되어 왔다. 인류의 공동자산은 거의 사유화되어 축소되고, 기업의 이윤극대화는 정당화시켜 온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시민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모든 창작물과 심지어는 창작물이 아닌 유전자와 같은 생물학적인 것에도 특허를 합법화하고 기업의 이윤을 보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글, 그림, 사진, 음악 및 영화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저작권 강화로 세계시민들의 자유로운 이용은 금지되고 불법화되어 공공의 영역은 축소되었다. 뉴미디어 세대가 희망한 사이버 상에서의 자유로운 정보의 생산과 공유 대신에 그들의 행위에 ‘불법’이란 멍에를 씌우고 있다. 물론 여기선 아동포르노 배포 및 사이버 성매매 등과 같은 인권을 무시하는 반인륜적 행위들까지 보호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 개인의 자유가 국가에 의해 완전히 감시, 통제되는 모습을 나타낸 2009년 독일 해적당 선거광고의 한 장면.
한국의 경우 IT왕국이라고 자칭하며 높은 인터넷 이용률과 아이폰 및 스마트폰의 이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정보독점이 아닌 정보공유와 정보의 자유, 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인터넷이 표현의 자유 확장을 의미함에도 현 정부는 그 의미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개방, 참여 및 공유를 칭하는 Web 2.0의 열린 인터넷 환경 속에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SNS와 소셜 미디어가 확산되고 시민들의 의견표출 공간이 넓어졌지만, 일명 ‘토목건축세대’ 혹은 ‘삽질세대’로 일컬어지는 구시대의 권력자들은 시대착오적 검열정책으로 인터넷시대를 공안시대로 되돌려 놓고 있다. 전기통신기본법 47조 1항에 의거한 일명 미네르바 사건, 인터넷 실명제 실시, 사이버 명예훼손 강화 및 사이버모욕죄 추진 등 사이버상에서의 수많은 제약들은 프리덤하우스가 공개한 2011년도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이 세계랭킹 70위를 기록한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오늘의 뉴미디어 세대는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어울리는 정치를 요구한다. 하지만 현 구시대 정권은 여전히 뉴미디어시대에 역행하는 뚱딴지같은 시민통제 정책만을 남발하며, ‘나는 꼼수다’ 등이 이용하는 팟캐스트를 비롯해 ‘SNS 규제’까지 하겠다고 발악하고 있다. 그 덕택에 한국은 오늘날 자랑스러운 IT왕국인 동시에 부끄러운 인터넷 검열왕국이 되었다. 이대로 간다면 표현의 자유부분에선 곧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21세기에, 20세기 뉴미디어 혁명도 경험하지 못한 듯한 구세대의 미디어정책으로 신세대들을 앞으로도 계속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서 현 정부는 하루 빨리 깨어나야 할 것이다.

* 본 칼럼은 2011년 한국정치평론학회 추계심포지엄에서 필자가 발표한 <뉴미디어시대의 정치혁명과 그 의미> 일부내용을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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