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물이 엎질러졌지만 수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을 일사천리로 경질시켰지만 차기 감독을 누구로 선임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실정입니다. 문제는 이전에 후보군에 올라왔던 감독들이 또다시 언급되고 있으며, 대부분 고사하겠다는 뜻을 전해오고 있어 이렇다 할 진척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사 뜻 전한 후보군, 그래도 끌어오려는 이유

지금까지 언론 지상에서 언급되고 있는 차기 대표팀 감독 후보군은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 김호곤 울산 현대 감독,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 압신 고트비 전 대표팀 코치 등 모두 4명입니다. 물론 이 감독들은 모두 저마다 갖고 있는 장점으로 매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최강희 감독은 확실한 색깔을 드러내며 최근 전북을 두 차례 우승시켰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고, 김호곤 감독은 풍부한 경험과 이번 K리그 챔피언십에서 울산을 강팀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호평받았습니다. 또 2002년 비디오분석관을 하면서부터 한국대표팀과 인연을 맺어 한국 축구를 잘 아는 고트비 감독, 청소년팀, 올림픽팀을 맡으면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현 대표팀의 주축인 젊은 선수들을 잘 아는 홍명보 감독 역시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는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한 상황입니다. 대표팀 감독보다는 현재 맡고 있는 팀에 더 열중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무엇보다 대표팀 감독 자리에 대한 부담, 그리고 이번 조광래 감독 경질 과정에서 나온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겹치면서 더더욱 감독을 맡지 않으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축구협회의 자세는 이들 중에서 한 명을 최대한 끌어보려는 것 같습니다. 쿠웨이트와의 브라질월드컵 3차예선 마지막 경기가 2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K리그도 열리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축구를 모르는 사람을 데려오는 것보다는 현역 국내파, 지한파 감독이 훨씬 더 위험부담이 덜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 언론 보도로는 클럽팀 감독과 대표팀 감독을 겸임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까지 해주는 것도 축구협회가 고려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언급되고 있는 후보군 가운데서 빠른 시일에 감독 선임을 진행하려는 듯합니다.

▲ 최강희 전북 감독, 김호곤 울산 감독. 대표팀 감독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만 본인들은 모두 고사 뜻을 밝혔다. (사진: 김지한)
땜질식 처방,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그러나 이는 방향부터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소위 땜질식 처방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는 것에서만 넘어가려 하고 그 이상, 그 다음을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이전에도 이런 모습 때문에 호되게 당했던 적이 있었지만 또다시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2004년 한국 축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겪었습니다. 새로운 색깔을 입히며 온갖 시행착오를 겪다 베트남, 오만 등에 지고 몰디브와 비기는 수모를 당하며 경질된 움베르투 쿠엘류 감독의 후임을 축구협회는 최대한 빨리 찾겠다고 공언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때 찾지 못하고 한동안 박성화 수석코치의 감독대행체제로 팀이 운영됐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논란을 일으키다 결국 나이지리아 전 올림픽팀 감독이었던 조 본프레레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했지만 오히려 경기력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종예선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두 차례 패하는 등 또 부진한 성적을 내며 1년여 만에 딕 아드보카트 감독으로 교체했습니다. 독일월드컵 본선까지 4년 동안 감독대행까지 포함해 모두 4명이나 바뀌었던 것입니다.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독이 든 성배'로 불릴 정도로 자주 바뀌는 것은 장기적인 대표팀 체질 개선 같은 목표보다는 단순히 월드컵 본선 진출, 월드컵 본선 성적에만 집착하는 탓 때문입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유럽 축구 중계 증가 등으로 눈이 갈수록 높아지는 팬들의 지나친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지만 메이저 대회 성적에 협회의 운명까지 좌우되다보니 어떤 장기적인 발전을 추구하고 과정을 중시하는 감독보다는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감독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능력 있는 감독이라도 잠시 성적이 부진하기라도 하면 호되게 비판, 비난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를 피하지 못하고 물러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협회가 조금이라도 의지가 더 있었다면 지금까지 한국대표팀을 거친 감독 중에서 더 오랫동안 함께 해서 대표팀 판을 바꿀 수도 있는 사례들이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가장 오래 대표팀을 맡은 감독의 재임 기간은 2년 6개월이 전부입니다. 유럽 강팀 감독들이 4-5년 정도 재임하고 있는 것과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월드컵 진출만큼이나 장기 발전-개혁 이끌 수 있는 인물 뽑아야

지금 축구협회가 하고 있는 감독 선임 작업 역시 오로지 브라질월드컵에만 몰입해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시아 최강자로서 월드컵에 진출해야 하는 목표를 제대로 이룰 수 있는 감독이 한국대표팀 감독직에 올라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만큼이나 한국대표팀의 장기적인 발전, 개혁을 이뤄낼 수 있는 지도자 역시 중요합니다. 기존 틀에서 깨어 정말로 '탈아시아'를 추구하고 한국 축구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데 역할을 다하는 감독이라면 자연스레 월드컵 진출도 이끌고 한국 축구의 진정한 도약에도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광래 감독 경질 후 축구협회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 보였던 모습 그대로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이렇게 되면 또 2004-2005년에 겪었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광래 감독의 경질이 한국 축구에 터진 위기이자 새 감독 선임을 통한 새로운 기회를 맞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구협회가 보여주고 있는 현재의 행보는 기회보다는 위기만 더 가속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려 하는' 축구협회. 악순환 반복이냐, 뒤늦게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느냐, 기로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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