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5년간 국민소득이 300배 증가했단다.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유일무이한 일들이 빈번한 사회이다. 유일무이한 것이 또 하나 있다. 한국은 아마 미국의 질서인 야구와 세계의 질서인 축구가 공평한 위상을 갖고 있는 유일무이한 나라일 것이다. 2002년을 계기로 야구와 축구의 위상이 교차점을 지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스포츠는 문화적 환경을 반영하기에 야구의 저력을 허투루 볼 수는 없다.

▲ 조선일보 3월 28일자
3월 29일 겨우내 기다렸던 야구가 드디어 개막한다. 야구를 기다리던 올 겨울은 유난히 스산했다. 야구의 상징적 공간인 동대문야구장의 철거 공사가 시작됐고, 현대 유니콘스도 사라졌다. 베어져나간 거목들이 아쉽지만 야구의 숲은 여전히 광활하고 푸르다.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야구의 숲으로 가보자! 급한 마음에 앞서 먼저 아홉 발자국을 떼어봤다. 물론, 미력한 발걸음이기에 틀린 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야구의 숲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자기만의 지도를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나의 지도는 숫자이다. 믿거나말거나 숫자에 따라 본 2008 프로야구이다.

첫 번째, 발자국 : 1위는 누가?

절대 지배자 해태가 몰락한 이래 야구에선 독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투수 왕국 현대, 지키는 야구의 삼성, 뚝심의 두산이 강자의 면모를 보였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작년에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스포테인먼트(spotainment←sports+entertainment)를 선언했던 SK가 우승을 차지했다. 엄숙한 장인(匠人)의 면모를 보여준 김성근 감독의 힘이었다. 2008 시즌은 각 팀의 전력 변화가 특히 무쌍하여, 1위 팀을 예상하는 것 자체가 만용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숟가락을 놓을 수 없는 많은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예상은 SK, 삼성, 두산, 기아를 4강 후보로 놓고 SK와 삼성이 우승을 다투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과감히 한 발 더 나간다. 올해의 1위는 명가를 재건한 기아 타이거즈의 몫이 될 것이다. 시범 경기 1위를 차지한 기아는 전력 보강에서 다른 팀을 압도한다. 광주 지역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서재응, 최희섭 두 메이저리거가 돌아왔고, 썩어도 준치라고 한국 땅을 밟았던 역대 외국인 선수 중 가장 화려한 이력에 빛나는 호세 리마(1999년 메이저리그 21승)와 시범경기 도루 1위를 차지한 수준급 유격수 윌슨 발데스가 훌륭하다. 이 뿐 아니라 굴욕적 꼴찌를 당했던 지난 시즌 다양한 패전의 경험을 쌓으며 발굴해낸 젊은 선수들의 기량도 일취월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전력의 배가 요인은 신임 조범현 감독이다. 기아의 성적 부진이 장기화되면서 잦은 감독 교체가 있었지만 매번 실패로 끝났었다. 감독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오랜 실험으로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기아이지만 선수 자원이 다른 팀에 비해 특별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과학적 야구의 부재였다. 그런 드디어 기아에 조범현의 데이터 야구가 도입됐다. 조범현은 시범경기 내내 다양한 선수들을 테스트하면서도 1위를 차지함으로서 달라진 기아 야구를 예고했다. 나지완이라는 예감이 좋은 신인도 발굴했다. 팬들의 무너진 자긍심을 찾아 주겠다는 조범현의 행보가 든든하다.

두 번째 발자국 : 20승 투수는 나올 것인가?

지난 2년간 류현진이 보여준 수치는 비교급이 아니었다. 그는 절대급이었다. 류현진은 데뷔 첫 해인 2006시즌에 18승 6패 1세이브(방어율 2.23)로 다승-방어율-탈삼진 3관왕을 독식하며 사상 첫 신인왕과 정규 시즌 MVP를 동시 석권했다. 2년차 징크스에 대한 우려가 있던 작년에도 여섯 차례 완투승을 포함해 17승 7패(방어율 2.94)로 변함없는 모습을 보였다. 87년생 이제 갓 데뷔 3년차를 맞은 그이지만 그는 한국야구 전체를 대표하는 부동의 에이스이다. 만약, 올해 류현진이 극강 본좌 선발을 상징하는 20승을 달성한다면 그는 이제 현존하는 전설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현재 프로야구를 전체를 봐도 20승 달성을 언급할 만한 선수가 류현진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는 누가 뭐래도 2008 프로야구를 지배하는 불세출의 단독자이다.

세 번째 발자국 : 3할 타자 이종범은 귀환할 것인가?

작년부터 올해까지 프로야구 장외 게시판을 가장 오래 달구고 있는 이슈를 뽑으라면 단연 '이종범'이다. 2007년 2군 강등 등 초라한 성적으로 은퇴 기로로 몰렸던 이종범은 다양한 논쟁(강기웅과 이종범의 원조 천재 논쟁, 김재박 류중일 이종범의 수비 논쟁, 장효조 이종범의 타격 논쟁 등)의 대상이 되면서 경기장 밖 열기를 고조시키는 인물이 되었다. 야구팬 입장에서 흥미진진한 일이긴 했지만 그것은 이종범 선수의 무대가 이제 더 이상 그라운드가 아닌 게시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나이 듦에 관한 서글픈 기록이기도 했다.

▲ 경향신문 3월 27일자
하지만 이종범 선수는 명예로운 은퇴가 아닌 치열한 현역을 선택했다. 물론 조건부이다. 올해 그의 성적이 그의 진로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적은 이종범이기에 2할 8푼이나 9푼이 아닌 최소한 3할이 기준이다. 참고로 이종범은 일본에 진출하기 전까지 타격의 달인 장효조의 통산타율 기록 3할 3푼 1리를 넘어서는 통산타율 기록(3할 3푼 2리)을 갖고 있던 유일한 타자였다. 이종범은 3할 타자로 귀한할 것인가? 물론, 올해 이종범의 활약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플레이를 지켜봤던 행복은 영원할 것이다.

네 번째 발자국 : 40승 달성, 우리 히어로즈의 운명은?

우여곡절 끝에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했다. 그래서 올해도 리그는 변함없이 8개 구단으로 치뤄진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네이밍 마케팅이라는 기묘한 운영방안을 제시한 우리 히어로즈는 거품 연봉 논란을 일으키며 선수들의 연봉을 반토막 삼토막 냈고,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잔혹한 감독·코치 교체를 단행했다.

스토브리그 내내 화제의 중심에 섰던 우리 히어로즈의 박노준 단장은 이 모든 것을 '메이저리그'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관심은 그 '메이저리그' 방식이 과연 몇 승을 거둘 것인가이다. 조금 더 객관적이고 잔인하게 말하자면 과연 40승을 할 수 있을까의 여부이다. 126경기가 치러지는 프로야구에서 40승은 승율 3할이 조금 넘는 수치이다. 참고로, 85년 창단됐던 청보 핀토스의 승률은 3할5푼8리였고, 86년 창단된 빙그레 이글스는 2할9푼이었다. 청보를 이었던 태평양 돌핀스 역시 창단 첫해 3할1푼9리의 저조한 승률을 기록했다. 91년 창단된 쌍방울 레이더스만인 4할 승률을 간신히 넘어섰었다. 지금 우리히어로즈의 상황은 쌍방울 레이더스 보다는 역대 최악의 승률을 기록했던 82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가깝다. 어떤 팀도 우리 히어로즈에게는 지려하지 않을 것이다. 선수들 역시 연대 의식으로 사용자의 극악함을 보여준 우리 히어로즈를 단단히 벼르고 있다. 40승은 그 마지노선이다.

다섯 번째 발자국 : 50홈런을 누가 넘어설 것인가?

선수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유쾌한 동행이다. 굳은 살이 베기기 전 어수룩한 모습에서 기량이 만연한 베테랑으로 진보해가는 길에 우리 인생의 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엇비슷한 기량의 라이벌까지 함께 해 준다면 금상첨화이다. 롯데의 4번 타자 이대호와 한화의 4번 타자 김태균을 지켜보는 일이 딱 그러하다. 동갑내기로 이제 완숙한 프로 8년차에 이른 두 선수의 현재까지의 모습은 완벽한 라이벌이되 그 모양새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연상케 한다. 타격 3관왕의 트리플 크라운에 빛나는 이대호가 모차르트라면 무관의 제왕으로 언제나 이대호의 비교급으로 등장하는 김태균은 살리에르이다.

그러나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이대호와 김태균의 진정한 승부는 둘만의 동심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 밖의 것들을 제압하는데서 결정날 것이다. 이 둘의 핵심적 승부는 결국 지금은 일본에 있는 국민 4번 타자 이승엽을 넘어 설 수 있는가이다. 그 조건은 최소한 홈런 50개이다.

이대호 선수가 50개의 홈런을 친다면 26개의 홈런으로 홈런왕에 올랐던 타격 3관왕의 진가를 재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김태균 선수가 50개의 홈런을 친다면 비로소 살리에르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 좋다. 50번의 카타르시스에 도전할 영웅은 누구인가?

여섯 번째 발자국 : 60승, 가을에 야구하기 위한 최소 조건

야구의 땅 부산을 지배하는 오랜 주술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가을에도 야구하자'이다. 롯데가 전통적 강호의 면모를 잃어버리고 단골 꼴지 후보가 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올해 역시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롯데가 가을에 야구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60승 이상이 필요하다. 작년 4위였던 삼성은 62승, 재작년 4위였던 기아는 64승을 거두었다. 작년에 롯데는 55승을 했고, 재작년에는 50승을 했다. 해마다 5승에서 10승 정도가 항상 부족했다. 만성적 한계로 보느냐, 극복할 수 있는 사소한 아쉬움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입장은 천치 차이가 된다. 그동안은 저주에 가까운 만성적 한계였다.

▲ 동아일보 3월 28일자
다행히도 올해에는 이 저주가 되어버린 만성적 한계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결정적 변수가 있다. 롯데는 프로야구 최초로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Jerry Royster)를 영입했다. 그는 우리 히어로즈의 말만 '메이저리그'식이 아닌 진짜배기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유일한이다. 그의 경험이 우리가 알던 롯데에 딱 5승만 추가할 수 있다면 산술적으로 롯데가 가을에도 야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생긴다. 생각 여하에 따라, 감독의 역량에 따라 5승에서 10승 정도가 결정 될 수 있다. 만약, 롯데가 가을에도 야구할 수 있다면 프로야구는 정말 재밌을 것이다. 부산 갈매기의 비상을 기대한다.

일곱 번째 발자국 : 70년생 두 동갑내기의 운명은?

정민태, 마해영, 안경현, 이종범 진부한 이름들이지만 여전히 리그에서 강한 존재감을 뿜고 있는 노장들이다. (여기에 나이는 한 살 많지만 데뷔는 같은 양준혁까지 더한다면) 아직도 프로야구를 지배하는 가장 강한 친구들은 70년생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70년생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된 정민태와 마해영이다.

▲ 세계일보 3월 28일자
정민태는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1999년, 20승 7패)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우완 에이스이다. 그러나 다승왕과 승률왕을 석권했던 2003년 이후 뚜렷한 활약이 없었다. 급기야 올해 요미우리 진출 외에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고향 팀에서 필요없는 고액 연봉자로 지목받고 기아로 팀을 옮겼다. 황혼기에 이른 그이지만 여전히 그의 직구와 커브는 위력적이다. 만약, 그가 올 해 주목할 만한 부활을 이룬다면 기아의 우승도 그만큼 수월할 것이다.

마해영은 부산 갈매기가 높이 날았던 시대를 풍미했던 4번 타자였고, 삼성의 우승을 결정지은 해결사였지만, 안정적인 말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마해영을 여러 팀을 전전긍긍하는 저지맨(judge man)으로까지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긴 하지만 하여간 그는 스토브리그 내내 '계륵' 같은 존재였다.

그런 마해영을 받아 준 것은 고향 팀 롯데이다. 롯데에 입단히기 위해 테스트까지 치룬 마해영은 아직도 선수를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근본적 꼬리표을 달고 그렇게 6년 만에 다시 처음 그 자리로 돌아왔다. 확실히 아직 그의 귀환을 금의환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롯데의 4강에 프로야구 전체의 흥행이 걸려있다면 마해영의 방망이에 롯데의 4강이 걸려있다. 그의 귀환이 열렬한 환영으로 바뀐다면 롯데의 성적은 필연적으로 윗자리가 될 것이다.

여덟 번째 발자국 : 8월의 야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올해 야구는 예년에 비해 조금 일찍 시작한다. 8월에 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열렸던 최종 예선에서 한국은 준우승을 거두고 베이징올림픽에 참여한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은 미국, 쿠바, 캐나다, 일본, 대만과 겨룬다. 아마추어리즘의 제전이었던 올림픽에 프로 선수들이 출전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스포츠의 상업화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미국의 필요였다. 농구와 마찬가지로 야구 역시 아마추어에선 상대가 없었던 쿠바를 미국이 이기기 위해서 프로의 참여를 허용했다. 그러나 도저히 질 수 없을 것 같던 미국 농구 드림팀의 무패 행진이 애저녁에 끝난 것처럼 야구에서 미국이 반드시 우승하느냐가 꼭 인과관계인 것은 아니다.

메이저리그 시즌 중인 까닭에 미국이 이번 대회에 베스트 멤버들로 팀을 꾸릴 수 있을지 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병역의 혜택이 주어지는 거의 유일한 대회인 올림픽에 한국 선수들이 갖는 열정 또한 대단하다. 객관적으로 한국보다 전력이 앞서는 나라는 미국, 일본, 쿠바 정도이다. 축구에 비해 월등히 세계화의 정도가 떨어지는 야구에서 국가대표간의 경기는 희소성만큼 언제나 재밌다.

아홉 번째 발자국 : 9회 말의 최강자는 누가 될 것인가?

강팀의 면모는 마무리 투수에서 드러난다. 삼성이 강팀으로 군림하는 것은 언터처블(untouchable) 돌직구 오승환의 존재 때문이다. 오승환은 정명원, 선동열, 구대성의 계보를 잇는 현역 최고의 마무리 투수이다. 팔꿈치 부상으로 아직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있고 지난 3년간의 피로가 누적되었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역시 올해도 마무리는 오승환이 압도할 가능성이 높다. 오승환에 도전하는 선수로는 리그에서 가장 좋은 직구를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 기아의 한기주와 베이징올림픽 예선에서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LG의 우규민 정도가 될 것이다.

또 한명의 주목해야 할 선수는 우리 히어로즈의 마무리를 맡게 된 고졸 신인 김성현이다. 시범경기에서 155km의 구속으로 화제에 올랐던 김성현은 "40세이브 이루고 신인왕 먹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신인 선수가 첫 번째 시즌에서 마무리 투수의 보직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팀 내 사정이 작용을 했겠지만, 굉장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김성현의 바람이 이뤄져 오승환의 마무리 독점(!) 시대가 어제의 얘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학교라고 믿었던 사회운동을 휴학하고 몸을 더듬어보니 라이타 한 개밖에 없더라는 싸구려 열정에 여전히 감격하는 청년 백수. 을용타에 열광하는 청년 백수들이여,라이타(right-打)하라! 오른쪽을 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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