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사이에 폭풍이 무섭게 휘몰아쳤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축구 행정력의 한계, 무능함 등 온갖 치부를 다 드러내고 망신을 자초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을 경질한 과정은 한마디로 '밀실 행정'의 극치였고, 온갖 부조리한 면면을 스스로 시인한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당장 브라질월드컵 3차예선 마지막 경기가 2달 반 앞으로 다가왔고, 어떻게든 새로운 감독을 선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축구협회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이달 안에 감독 선임 작업을 마무리하고 조속히 분위기를 추스르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몇몇 후보군이 나오고는 있지만 대부분 고사하고 있는 상태여서 사실상 백지 상태에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모든 작업을 끝내야 합니다. 그렇기에 또다시 '졸속 선임' 우려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기왕 감독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었고 기존 감독을 경질까지 했다면 제대로 된 새 감독을 뽑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그 감독이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은 제대로 보장해줘야 할 것입니다.

▲ 불명예 퇴진하게 된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 최근 성적 부진이 원인이었지만 축구협회 수뇌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지나친 간섭을 받으며 결국 갑작스레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연합뉴스
지나친 간섭, 정치적인 접근을 배제하라

우선 축구협회 어느 누구든 대표팀 운영의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은 최대한 배제해야 합니다. 그동안 이 같은 간섭은 기술위원회가 주로 해왔습니다. 물론 기술위원회가 감독을 선임하고 해임할 권리를 갖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권리를 남용해 대표팀 분위기 자체를 좌우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수 선발 권리부터 시작해 감독의 전술 운영 부분까지 간섭해 감독과 대립각을 세운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는 조광래 감독 체제에도 그랬고, 전임 허정무 감독 체제 때도, 이전 외국인 감독이 맡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여기에는 기술위원회 내부에 축구협회 상부층의 입김이 작용했기에 그랬습니다. 기술위원회는 대표팀 운영을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축구의 기술적인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명목상 독립기구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례에 드러났듯 기술위원회는 회장단, 스폰서 등의 외부 압력에 굴복했고 소신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일을 계기로 기술위원회의 역할론, 명확한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감독이 역량을 발휘하고 지도력이 어느 정도 자리잡힐 때까지 최대한 배려하고 지켜보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감독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면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는 것보다 함께 토론하고 발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정기 회의를 신설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어떤 축구계의 내부 정치적인 논리도, 외부 압력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확실한 시간을 보장하라

유럽 강호 국가대표팀 감독들은 기본 2년에서 최대 10년 넘게 감독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덴마크의 모르텐 올센 감독은 2000년부터 12년 동안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비록 지난 남아공월드컵에서 일본에 패하는 등 부진한 모습으로 예선 탈락하기도 했지만 '올센의 아이들'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을 정도로 축구인들과 팬들의 높은 신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 잉글랜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2007년부터 감독직을 맡았으며, 독일 요하임 뢰브 감독도 2006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이후 대표팀을 맡아 장수 감독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 외에도 지난해 사임했던 그리스 오토 레하겔 감독은 11년이나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명장' 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 역시 2008년부터 스위스대표팀을 맡아 4년째 팀을 이끌고 있습니다.

▲ 한국 축구 최장수 감독(2년 6개월)으로 남아있는 허정무 감독 ⓒ연합뉴스
이들 감독의 공통점은 결과가 부진했던 적도 있지만 협회, 그리고 팬들이 최대한 신뢰를 보내주고 역량을 발휘할 시간을 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올센, 레하겔, 히츠펠트 모두 월드컵, 또는 유로에 본선조차 나가지 못하는 부진이 있었지만 대표팀의 체질 개선, 확실한 대표팀 시스템 구축으로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얻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장수 감독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꾸준히 이어가며 지금도 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하고 팬들의 응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은 '독이 든 성배'라는 외신 보도가 나올 정도로 오랫동안 감독직을 유지하고 자기 색깔을 보여준 사례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남아공월드컵 본선에 올라 16강까지 진출했던 허정무 감독이 2007년 12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맡은 것이 역대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최장수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감독이 오랫동안 신뢰를 받으려면 그만큼 뚜렷한 철학과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감독이 많은 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시간을 보장해주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춰져야 감독도 더 확실한 성과를 내는데 모든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소신 있는 팀 운영으로 오랫동안 대표팀 감독을 맡고 축구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지도자를 많은 우리 축구팬들은 보고 싶어 합니다.

대표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라

앞서 기술위원회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지만 기술위원회도 그렇고 축구협회 전체적으로 대표팀 감독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써주고 지지해주는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대표적인 것이 선수 차출 시스템입니다. 월드컵, 올림픽 같은 대회야 큰 대회이기에 선수 차출 의무 규정이 있고 거의 절대 다수 팀들이 차출에 응한다고 치지만 프로 경기와 겹치는 시즌에 치러지는 평가전, 예선 같은 경우, 의무 규정이 있어도 차출에 반대해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젊은 선수들의 분전, 해외파 증가로 조금은 복잡하게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감독이 소집을 요구하는 선수가 있다면 아무 문제없이 선수를 소집하고, 각급 대표팀과 중복될 경우 문제를 잘 조율할 수 있도록 중간 다리 역할을 잘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외에도 선진 기술 도입, 훈련 환경 개선 등 대표팀 경기력 향상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다각적이고 디테일한 지원 환경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것입니다. 대표팀에 있을 때만큼은 대표팀 훈련에 집중해 선수들의 전체적인 경기력 향상을 이끌고 대표팀 수준 향상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환경 조성, 개선이 필요합니다.

모든 걸 지키는 게 어려울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감독이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해서 대표팀 체질을 바꾸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축구를 펼치는 것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의 절대 다수는 이런 기본적인 혜택을 입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툭하면 문제가 일어나고, 지켜보는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조만간 새로 뽑을 감독은 제대로 뽑되, 그만큼 역량을 모두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지원하는 '상생 모델'을 축구협회 스스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감독으로 거듭나는 모습까지 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어쨌든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라는 자리는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수장이고, 당연히 한국 축구팬으로서 지지받아 마땅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축구협회 입장에서도 결코 나쁠 일이 아닙니다. 많은 팬들이 자부심을 느낄 만 한 대표팀 감독, 그 과정이 참 인상적이었다는 말을 들을 만한 축구협회의 모습을 한 번 제대로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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