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딘 홍상수 감독은 오래도록 자기 세대를 대변해온 대표적인 감독이었다. 그 홍상수 감독이 이제 자신들의 시대를 넘어 다음 세대 이야기에 운을 뗀다.

71회 베를린 영화제는 은곰상(각본상) 수상을 통해 홍상수 감독이 펼치는 또 다른 영화적 세계의 변주에 찬사를 보냈다. 불미스러운 개인사를 차치하고, 홍상수 감독만큼 영화적 성찰에 초지일관 성실한 감독이 있을까 싶다.

그간 홍상수 감독이 만든 영화 속 주인공들은 영화감독, 대학 강사, 시인 등등 그래도 대학을 나와 머리에 든 건 좀 있으며 그걸로 밥벌이를 하고 살아가던 존재들이었다. 이른바 지식인, 인텔리들이었다. 하지만 그 지식인들은 그들의 지적인 배움과는 달리,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수컷으로서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영화 <인트로덕션> 촬영 현장

그를 통해 동시대인들, 그중에서 시대를 대변한다는 남성들이 가진 모순을 자아비판해왔다. 결국 홍상수의 페르소나인 영화 속 주인공은 예의 숨길 수 없는 본능적 행각으로 평생을 전전한 끝에 쓸쓸한 모텔 화장실에서 생을 다한다(<강변호텔>). 홍상수가 본 '그들'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자기 세대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은 홍상수 감독은 <도망친 여자>를 통해 이 시대 여성들의 모습에 눈을 돌리더니, 지난 5월 27일 개봉한 <인트로덕션>을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에 대해 말문을 연다.

그런데 <인트로덕션> 속 젊은이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간 홍상수 감독이 줄기차게 그려왔던 감독 세대의 아들과 딸이다. 영화는 세 편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에는 모두 '영호(신석호 분)’가 등장한다. 영호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영호란 젊은이, 젊은 세대를 설명하고자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등장하는 세대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 이미지

세 편의 이야기에는 한 아버지와 두 명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아버지(김영호 분)는 한의사다. 그는 환자를 보기에 앞서 간절히 기도한다. 자신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그런데 그의 기도는 절실한데, 보면 볼수록 예의 홍상수 감독 영화 속 남자들처럼 '자의적'이어 보인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 영호가 찾아온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지만 매우 오랜만에 본 사이, 심지어 알고 보니 아버지가 불렀다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하냥 기다리게만 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아니면 말고 식’ 해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진 심리적 트라우마에 '홍길동 콤플렉스'가 있다고 한다. 즉,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버지 세대는 '아버지'라 부르기에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못나서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도 남의 손으로 이루고, 그나마 독립을 했더니 자기들끼리 죽자고 싸우고 도대체가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인트로덕션>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그 부끄러운 아버지를 지양하겠다고 했던 세대가 아버지가 되고 나니, 아들을 불러 놓고도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러고는 자기에게 자꾸 기회를 달라고 기도를 한다. 아버지가 되어서도 홍상수의 세대는 여전히 '입'만 살았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 대신 아버지를 찾아왔던 연극배우의 한 마디에 힘입어 배우의 길을 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 한 마디라는 게 모호한 충고다. 그저 배우 할 만한 얼굴이라는 평범한 촌평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한 마디에 기대어 배우가 되겠다는 아들은 이제 세 번째 이야기에 이르면 자신이 선택한 길에 회의를 하게 된다.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 이미지

그런 아들을 닦달하여 이른바 대배우와의 상견례를 마련한 사람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길에 대해 모호한 아들이 영 마땅치 않다. 그래서 외딴 '강변호텔'이 있는 식당으로 아들을 불러 대배우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청한 대배우가, 한의사였던 아버지의 병원에 손님으로 왔던 사람이다. 이 정도면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싶다. 한 술 더 떠서 여자친구 때문에 키스신이 저어된다는 아들의 고백에, 대배우란 사람은 술이 얼큰하게 취해 '사랑지상주의'를 부르짖는다. 말이 아들을 향한 충고이지 그 옆에 있는 아들의 어머니를 향한 '고백' 같은.

또 한 명의 어머니는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온다. 패션을 공부하겠다는 딸과 함께 독일로 온 어머니는 딸을 지인의 집에 머물게 한다. 그림 공부를 하는 여성이라 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지만, 막상 지인은 어머니와 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인트로덕션> 속 부모 세대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놓고 자기 연민에 빠져있고, 자식을 위한다는 어머니 역시 자신의 의도가 앞선다. 홍상수 감독은 바로 그런 부모의 세대를 이 시대 젊은이들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이유기

영화 <인트로덕션> 포스터

예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그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처럼 저 잘난 맛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듯 굴었다. 하지만 <인트로덕션>은 자기중심적인 부모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젊은이들로 시작된다.

영화 속 사랑하는 주원(박미소 분)을 찾아 무작정 독일까지 찾아온 영호는 한의사인 아버지에게 도움을 얻어 자신도 독일에서 공부나 할까 한다. 아버지를 찾아가 우연히 배우 할 얼굴이라는 말에 어머니처럼 배우의 길에 나서보기도 한다. 독일까지 패션을 공부하러 왔다는 주원 역시 어쩐지 자신의 선택이 미덥지 않다.

하지만 정작 사랑하는 이 때문에 키스신이 저어된다는 영호에게 이제는 연인이 없다. 사랑하는 이가 보고 싶어 독일까지 가고, 그녀를 따라 독일에서 공부라도 하겠다던 그 사랑은 꿈속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은 그렇게 젊은이들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한다. 기댈 구석이 못 되는 부모들. 그런데도 나서는 부모에게 기대보려 했지만 결국 차가운 바닷물 속에 뛰어들어 정신을 차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 스스로 가볼 수밖에 없는 그런 젊은이들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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