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정치권 후견주의를 배제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논의가 한국의 후진적 정치구조를 소환했다. 대의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양당체제가 고착화되면서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대한 정치권 개입이 심화됐다는 지적으로, 국민참여가 대안으로 제시됐다.

8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정필모 의원 주최로 열린 '공영방송 구조혁신과 공적책무 강화 방안' 토론회 참석자들은 정치권 추천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와 관련해 정필모 의원은 '국민위원회'를 구성해 공영방송 사장·이사를 추천·선출하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다만 정필모 의원안은 국민위원회를 방송통신위원회가 위촉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공정성과 독립성을 담보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KBS·MBC·EBS 등 공영방송 3사 사옥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주제로 발제한 김동준 공공미디어연구소 소장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은 대선·총선 정책협약, 방통위 업무보고 등으로 무수히 약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결국, 문제는 다시 반복되어 국회에 달려있다. 기존의 공영방송 지배구조 등 시스템으로 인한 문제가 노정되어 왔고,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공영방송의 역할과 책임이 훼손되었다면 현재의 구조에 대한 과감한 변화를 선택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소장에 따르면 해외에서 공영방송의 대원칙은 '독립성'이다. 대표적으로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CoE)는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대해 지속적으로 권고사항을 만들고 적용하는 기구로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47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는 유럽평의회의 결정이나 권고사항은 국제적 기준으로 상정된다.

유럽평의회는 이사회 구성과 사장선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독립성'으로 두고, 이를 법률안에 명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또 유럽평의회는 공영방송 이사·사장선임과 관련한 권고뿐 아니라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다양한 층위에서 보장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법 조항에도 없는 정치권의 공영방송 이사 추천을 관행으로 인정해 온 한국과는 차이가 크다.

김동준 공공미디어연구소장(왼쪽), 최선욱 KBS공영미디어연구소 연구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유튜브 방송화면)

토론자로 나선 최선욱 KBS 공영미디어연구소 연구원은 다양한 층위의 공영방송 정치적 독립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최 연구원은 일례로 정권교체와 공영방송 사장 임기 간 상관관계를 들었다. 1973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의 대통령이 총 9번 바뀌는 동안 KBS 사장은 총 17명이었고, 대통령 교체 후 8개월 이내 KBS 사장이 교체된 사례는 7번이다.

반면 영국의 경우 9번의 총리가 교체되는 동안 8개월 이내 BBC 사장이 교체된 사례가 없다. 일본 역시 총리가 24번 교체되는 동안 NHK 회장이 임기를 다하지 못하고 교체되는 경우는 없었다. 한국 대통령 평균 재임기간은 평균 58.8개월, KBS 사장의 평균 재임기간은 32.7개월이다. 반면 영국총리 평균 재임기간은 65.3개월 BBC 사장은 67.7개월이다. 일본총리 평균 재임기간은 24.5개월이고, NHK 회장은 45.3개월이다.

최 연구원은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KBS 사장이 바뀌는 상황을 이사회 구성이나 사장 선임절차의 변경만으로 차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공영방송 독립성 확보방안은 보다 여러 측면에서 검토되어 입법화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협력실장은 '공영방송의 독립성'이라는 대원칙이 한국사회에 적용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로 '양당체제'와 '제왕적 대통령제'를 꼽으면서 국민참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대한 정치권 추천을 정당화하는 핵심 근거는 대의 민주주의에 따라 선출된 정치권력의 '대표성'이다. 그러나 한국 선거제도 문제점과 양당체제 고착화 현상에 따라 정당 지지율과 의석 점유율이 비례하지 않는 상황에서 공영방송에 대한 정치권 개입의 정당성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21대 총선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논의되었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의 결과 위성정당의 탄생으로 거대양당체제는 공고해졌다.

김 실장은 "양당체제의 고착화에 따라 여야의 정책과 공약은 보수화되며 한국 사회의 정치적 스펙트럼과 더욱 멀어지게 된다"며 "여기에 한국 특유의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야당의 견제와 비판적인 시민 의견으로부터 대통령을 지키려는 정당과 강성 지지층의 활동은 공영방송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압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실장은 "국민참여는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현재의 양당체제와 제왕적 대통령을 근간으로 하는 ‘대표성’은 '정치체제'가 아니다"라며 "한국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은 시민·시청자와의 동일성·인접성·유사성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당 추천과는 달리 한국사회 지역·계층·연령·성별 등을 고려한 지배구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협력실장(왼쪽),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전국언론노동조합 유튜브 방송화면)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는 "‘국민이 더 이상 통치의 대상이 아닌 나라의 주인이자 정치의 실질적 주체로 등장하는 국민의 시대’를 선언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공영방송에 대한 시민들의 개입과 참여방식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며 "수많은 비용이 투입되는 공영방송을 정치적 논란의 대상으로 유지하는 상황은 대의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비판했다.

강 상임대표는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편 방향은 시민들의 절차적 개입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시민 커뮤니케이션 권리의 관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담으려는 시도와 결합되어야 한다"며 "공영방송에 대한 시민 참여는 이미 다른 미디어로 이동한 시민들의 일상과 관심이 공영방송 콘텐츠와 시스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길목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민주당 의원들은 일제히 정치권 추천 배제와 국민참여를 보장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필요성을 언급하거나 국회가 책무를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사과했다.

KBS 출신 정필모 의원은 "기자생활 30여년, 국회 들어와 1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공영방송 정치적 독립 문제를 반복해 얘기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가 여기서 왜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정치적 유불리만 따져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라며 "오늘 이 자리가 실천적 의지를 법과 제도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이원욱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위원장은 "사실상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요구는 별다른 결실 없이 공염불에 그치며 국민의 신뢰를 잃고 방송 운영에서의 공정성 논란을 유발하게 됐다"며 "국회 차원에서 입법을 통해 공영방송의 변화와 정치적 독립성 구현의 현실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련 개혁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조승래 과방위 민주당 간사는 "이 자리를 빌려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영방송 거버넌스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기대가 많았는데 실제로 진행이 잘 안돼 실망감을 가지셨을 거라 생각한다"며 "여야 간에 방송 TF 등 논의를 통해 합의를 이뤄보자 했지만 논의가 잘 안 되고 있어 시간만 속절없이 가고 있다"고 했다. 조 간사는 "분명하게 주어진 과제를 어떤 수순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구체적 실행계획을 고민하겠다"고 했다.

이원욱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8일 국회에서 열린 '공영방송 구조혁신과 공적책무 강화 방안'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전국언론노동조합 유튜브 방송화면)

과방위 소속 윤영찬 의원은 "청와대에 있을 때부터 이 문제에 대해 시민참여 방식을 높여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숙제로 남겨 둔 자체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며 "여야가 이제는 변화된 미디어 상황을 수용하고 지배구조와 규제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진지한 논의를 해야한다"고 했다.

이 밖에 민주당 송영길 대표, 윤호중 원내대표, 김용민 미디어혁신특위 위원장 등이 축사를 통해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창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 4년은 비가 안오니까 비가 새는 지붕을 그냥 놔두는 식으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문제를 다뤄왔다"며 "지금 지붕을 고치지 않는다면 공영방송 문제뿐 아니라 전체 미디어환경에서 여론 공공성이 심각하게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지금이라도 비 새는 지붕, 공영방송 지배구조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 달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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