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공군에서 성추행 피해를 당하고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모 중사의 사연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고 개선을 지시한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이번에야말로 이러한 악습과 폐단을 끊을 근본적 개혁이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럼에도, 기대와 희망을 가지기보다는 체념과 냉소부터 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거치는 통상의 과정을 다시 반복하는 게 아닌가 우려도 된다. 언론 보도 등으로 세상이 시끄러워지면 이런 저런 대책을 내놓는 등 부산을 떨다가 관심이 식으면 다시 하던 대로 하는 군 조직의 고질적 대응이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거다.

여군의 성추행 피해 구제보다 코로나19 시국의 부적절한 회식 사실을 덮으려는 노력이 우선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군의 내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근본 원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계급이 모든 것을 정당화 하기에 진급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는 폐쇄적 제도가 문제다. 둘째, 부실수사와 솜방망이 처벌을 가능하도록 해 시스템의 문제를 사법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떠맡는 군 수사 기관과 사법 절차 역시 문제다.

셋째, 이러한 점에서 이번 사건은 앞서의 ‘구조’가 남성중심적 조직 특성과 만나 여성 구성원을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동료로 여기기보다는 성적대상화 하는 폭력을 재생산한다는 문제를 드러낸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해결될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고 이는 장기간에 걸쳐 차질없이 집행되어야 한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지는 이와 관련된 전문성을 갖춘 전문가들의 지적이 다각도에서 제기되기를 기대한다. 정부와 군, 정치권은 이들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고 실효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에 힘써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서울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6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 추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부터는 사회개혁이라는 원론의 차원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지금 봤듯 이번 사건은 군의 ‘어떤 부분’이 문제라기보다는 거의 군 그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이를 변화시키는 과정은 단발성 대책으로 가능하지 않고 장기간에 걸친 사회 시스템 전반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군 뿐만이 아니라 대개의 권력기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문제는 이러한 과제의 성과가 임기가 한정된 정치권력과 연관돼 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정권에선 대표적인 게 검찰개혁이다. 정권이 넓은 범위에 걸쳐 펼쳐져 있는 수많은 개혁 과제를 모두 직접 감당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되돌릴 수 없는 변화로 시민사회가 강제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추동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그러나 이건 쉽지 않은 일일 뿐더러 ‘티’가 나지 않는다.

결국 시스템 내에서 ‘개혁을 잘 할 사람’을 우대하는 것으로 ‘개혁’을 대체하는 편의적 선택이 이뤄지게 되는데, ‘개혁을 잘 할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대개 자의적이다. 군에서는 육사 출신들의 카르텔 때문에 육군으로는 개혁이 안 되니 공군과 해군 출신을 우대하자든지, 검찰에서는 공안 출신은 안 되니 특수 출신을, 이제는 특수 출신도 못 믿겠으니 형사 공판부 출신을 우대하자는 식의 대응을 하는 게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개혁’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신념의 인물일지 단순한 기회주의자일지 권력이 어떻게 확인하겠는가? 결국 이건 ‘우리 편 우대’와 ‘상대 편 배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조건이 권력기관을 개혁하는 게 아니라 길들이고 싶은 정치권력의 기만적 욕망을 정당화한다. 각자의 방향은 달랐지만, 역대 모든 정권에서 ‘개혁’을 명분으로 사실상 권력기관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선 예외없이 ‘개혁’을 빙자한 온갖 ‘쇼’와 살풀이가 동반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우리 정치는 사태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주목하기보다는, 결국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자기 배만 채운 권력을 ‘반대’해야 한다는 서사를 만드는 걸로 해야 할 일을 대신했다. 문재인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는 것 외에 어떤 정치적 전망에 대한 자기 확신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묻지마 지지는 그 결과이다.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이준석 현상’도 그 근본을 따져보면 마찬가지다.

‘개혁’을 내세워 온 정치권력은 ‘개혁’을 무너뜨린 자신들의 오류를 직시하기보다는, 앞서의 ‘반대’를 다시 ‘반대’하는 것으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언론인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거쳐 이제는 정치인이 된 김의겸 의원의 ‘검찰 쿠데타’ 서사는 정확히 여기에 들어 맞는다. 김의겸 의원은 윤석열 전 총장을 전두환에, 한동훈 검사를 허화평에 비유하며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정치 행보를 전두환 일당의 그것에 맞추느라 열심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얘기다.

‘검찰개혁’ 애호가들은 종종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군에 대한 ‘문민통제’에 비유한다. 김의겸 의원의 검찰쿠데타론도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문민통제는 총칼과 탱크라는, 외적을 겨냥한 실제적 물리력을 정치권력에 복속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원론적으로 법의 통제를 받고, 본질적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검사는 그가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크든 간에 문민통제라는 맥락에서는 ‘문민’에 속한다. 검찰이 ‘자신에게 임명장을 준’ 정치권력을 수사하였다는 이유로 그것을 ‘쿠데타’로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수사기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정치적 서사와 여기에 휩쓸리는 다수의 주권자들 덕분에 개혁은 최악의 형태로 그 명분을 부정당해 번번이 좌초된다. 피해를 보는 사람들만 그대로다. 폐쇄적 구조는 개방돼 시민적 평가의 대상이 돼야 하고, ‘선출된 권력의 통제’를 넘어 ‘시민적 통제’가 이뤄져야 하며, 시민이 자신의 권한 행사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가 있어야 한다. 이런 체제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갔느냐가 평가 대상이 되어야 하고, 이번에도 그래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서술한 문제들 덕분에 기대를 갖기 어렵다. 계속 싸워 나가는 것은 아마도 앞으로도 상당 기간 소외되고 소수화 돼 있는 시민사회의 몫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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