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나쁜 이야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인간을 기능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성실한 주인공, 어수룩한 동료, 우유부단한 배신자, 비정한 악당 등 전형적인 성격의 인물들을 필요한 대목마다 호출하고 쉽게 버린다. 나쁜 이야기에는 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해도 결국은 창작자 한 명만을 만날 수 있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코엔 형제의 <파고>는 이런 측면에서 아슬아슬하게 나쁜 영화의 경계를 달린다. 주인공은 성실하게 선하고 악당들은 비열하게 잔인하다. 나쁜 이야기의 공식대로라면 <파고>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코엔 형제뿐이다. 게다가 코엔 형제는 자기들만의 확실한 스타일을 갖춘 스타일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고>를 코엔 형제만 만나는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전형적인 듯하면서도 특색이 살아있는 인물들은 삶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덕분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

슈퍼히어로도 슈퍼빌런도 없다

영화는 눈길을 헤치고 황갈색 시에라 자동차를 운송하는 제리(윌리엄 H. 머시)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제리는 칼(스티브 부세미)와 게이어(피터 스토메어)에게 차를 넘기며 부인을 납치하고 부자인 장인에게 몸값 8만 달러를 받게 되면 함께 나누자고 제안한다. 칼과 게이어는 그냥 장인에게 돈을 달라고 하라며 뭐하러 그런 쓸모없는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 제리는 빚이 있다고만 둘러댄다.

어쨌든 임무를 시작한 칼과 게이어. 무사히(?) 아내를 납치하는 데까지는 성공하는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뒷좌석에 아내를 태운 납치범들은 아지트로 향하는 길에 경찰의 검문을 받는다. 정식 번호판을 달지 않았던 까닭이다. 뇌물로 무마하려던 칼의 계획이 실패하자 게이어는 총을 쏜다. 칼이 경찰 시체를 처리하던 중 우연히 맞은 편에서 달려오던 목격자 2명도 게이어의 희생자가 된다. 이제 둘은 단순납치범에서 연쇄살인범이 됐다.

제리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긴다. 제리는 장인에게 납치범이 요구하는 몸값이 100만 달러라고 이중사기를 칠 생각이었다. 납치범에게는 8만 달러만 주고 남은 92만 달러는 빚을 갚고 주차장 사업을 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 그러려면 본인이 중간에서 돈을 운반해야 하는데 장인은 납치범들에게 직접 돈을 전달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사실 당연한 말이다. 100만 달러는 본인 돈이니까. 결국 장인이 납치범들과 협상에 나선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이 지난 이 시점에 주인공 마지(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등장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마지’ 역으로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후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 <노매드랜드>의 ‘펀’ 역으로 두 차례 더 주연상을 탄다. 세 번 후보에 올라 세 번 모두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세 차례 수상한 21세기의 첫 번째 여성 배우가 된다. 그러나 마지를 맥도먼드 커리어 중 최고의 연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좋은 캐릭터를 잘 살린 편에 가깝다. 물론 이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코엔 형제가 나쁜 이야기를 피해가는 쉽지만 어려운 방식도 바로 마지의 인물 구축에서 시작한다.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

마지는 사건 현장에 도착해 정황증거를 활용해 금세 외지에서 온 2인조의 범행임을 눈치챈다. 호기심 넘치는 소도시 주민들의 성격을 이용해 추격하는 영리한 면도 있다. 하지만 이후 수사 과정을 살펴보면 치밀하지 못한 범죄자들이 남긴 수많은 증거 덕에 비교적 편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추운 날씨 탓에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남편에게 부탁하는 헐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건의 흑막인 제리도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지능범은 아니다. 납치범들과의 약속 시각을 1시간 착각해서 쓸모없는 논쟁을 부르고 정식 번호판 대신 딜러 번호판을 달아 경찰의 심문에 걸리게 했다. 치밀한 납치계획은 당연히 없었고 심지어는 둘의 연락처를 몰라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칼과 게이어도 프로페셔널한 범죄자로 보기는 어렵다. CCTV가 사방에 깔린 지금이라면 반나절도 안 돼 수갑을 찰 정도로 투박하며 허술하기 짝이 없다.

슈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주인공. 슈퍼빌런이 아닌 평범한 악당. 할리우드 영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 주변 어디엔가 있을 법한 캐릭터는 <파고>에 엄청난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오프닝에서 자막까지 넣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과감한 거짓말에 수긍하고(모티브는 있지만 완벽한 픽션이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믿고 있거나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코엔 형제는 ‘악한과 영웅 양쪽 모두를 피부에 와 닿도록, 평범한 스케일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했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로켓을 만드는 과학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영화에선 그들을 현실보다 영리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사건이 어떻게 해결됐는지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의 어리석음으로 잡혀들어간다’고 말한다. (『코언 형제: 부조화와 난센스』 중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

평범함을 평범함의 자리에 두고 지키려는 노력

그렇다면 <파고>는 나쁘지 않은 영화로 그치는 걸까. 아니다. 마지와 제리의 대비로 <파고>는 나쁘지 않은 영화에서 훌륭한 영화로의 훌쩍 도약한다. 마지와 제리는 평범하게 평범하다. 눈이 많이 오고 설원이 펼쳐진 노스다코타주의 소도시 브레이버드 출신으로 Yeah를 Yah로 발음하는 특유의 미네소타 사투리를 쓰고 각자 경찰과 자동차딜러라는 괜찮은 직업도 갖고 있다. 번듯한 집도 한 채 있는 중산층으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기도 하다. 비슷한 배경을 가진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제리에게 왜 30만 달러에 가까운 빚이 생겼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빚더미에 올랐음에도 70만 달러를 챙겨서 주차장 사업을 하려는 까닭도 알 수 없다. 돈 많은 장인에게 동업을 제안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혼자 사업을 꾸리려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된다. 욕망의 시작은 보이지 않는데 파멸의 과정은 적나라하다. 과욕의 출발신호를 놓친 것 같은데 어느새 파멸의 결승점을 통과하기도 하는 우리의 삶과도 닮았다.

마지의 남편 놈(존 캐럴 린치)의 취미는 오리 그리기다. 사건이 모두 해결된 뒤 둘은 아늑한 침대에 나란히 눕는다. 놈이 말한다. 우표 도안 공모전에 자기의 청둥오리 그림이 선정됐다고. 마지는 호들갑스럽지 않게 진심으로 축하한다. 놈은 ‘자주 쓰이지 않는 겨우 3센트 우표’라며 실망한다. 마지는 그렇지 않다며 추가로 우표를 붙일 땐 작은 걸 쓴다고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영화는 끝난다.

신형철 평론가는 말한다. 좋은 이야기에는 겸허함이 있다고. <파고>는 평범한 선인이 일상의 행복을 지키려는 노력을, 평범한 악인이 욕망으로 파멸하는 이야기를 욕심내지 않고 겸허하게 그린다. 세상 모든 이야기가 흘러오는 할리우드에서 평범함을 비범하게 과대포장하려는 시도는 많지만, 평범함을 평범함의 자리에 두고 지키려는 노력은 드물다. <파고>는 그 드문 노력에서 오는 평범한 휴머니즘의 아름다움에 관한 ‘좋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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