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2019년 여름, 연극 한 편을 보았다. <그을린 사랑>으로 원작은 레바논 출신의 캐나다 작가 겸 연출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이다. 한 여인을 통해 전쟁의 비극적 서사를 섬세하게 직조하고 있다. 잔상이 오래 남았던 연극이었다. 걷다가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고, 숨 쉬는 게 아프네, 라고 느끼게 만들었던 가슴 먹먹한 연극이었다.

극은 나왈의 유언장이 공증인에 의해 쌍둥이 남매에게 전달되면서 시작된다. 유언은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형을 찾아 편지를 전하라는 것이다. 편지가 전달되기 전까지 비석도 세우지 말고, 이름도 새기지 말라고 유언하고 있다. 나왈은 자신의 시신을 관에 넣지 말고 나체로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엎어놓고 기도문 없이 묻어달라고 한다. 딸 잔느는 어머니의 침묵이 담긴 수십 개의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을 재생하고 또 재생한다-나왈은 죽기 몇 년 전부터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있었다- 딸 잔느는 결국 문제를 직면하고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어머니의 나라로 가게 되고, 아들 시몽도 어머니의 유언대로 아버지와 형을 찾아 어머니가 살던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나왈의 침묵은 깨진다.

연극 '그을린 사랑' 포스터

극에서 정확한 나라의 지명은 나오지 않지만 레바논의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과 이슬람교의 대립, 피를 부르는 복수, 잔인하고 악랄하기로 유명한 감옥. 모두 레바논 내전과 같다. 나왈은 민병대 대장을 저격하고 감옥에 수감된다. 그곳엔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이 있었다. 나왈은 아부 타렉에게 성고문을 당하고 잔느와 시몽을 임신하게 된다. 나왈에게는 잔느와 시몽 외에도 열네 살에 낳은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나왈은 열네 살에 무슬림 난민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둘은 도망치다 나왈의 동생에게 잡혀 남자가 죽게 된다. 그리고 나왈은 아기를 낳고 고아원에 보내진다- 시몽은 형을 찾게 되고 형이 저격수이며 고문기술자인 아부 타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왈의 침묵은 깨지고 약속은 지켜진다. 두 통의 편지는 형과 아버지에게 전달된다.

거의 세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몸서리치며 참혹과 마주한 기억이 난다. 증오의 대상이 그토록 찾아 헤맨 아들이었는지 몰랐던 어머니. 많은 사람을 죽여 유명해지면 자신을 알아볼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보고 싶어 하던 어머니가 자신이 고문하고 임신시킨 여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아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전쟁을 단순히 비극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참상이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끔찍하다.

전쟁은 도륙이다. 사람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인간성을 도륙하고 파괴한다. 극에서 당시 전쟁을 받은 것에 대해선 더하여 갚아주는 형식이라고 표현한다. 그 논리에 의해 아이들은 저격수가 되어 또래의 아이들을 죽이고, 민간인이 탄 버스에 총을 난사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시민 수백명 죽었는데…축제 즐기는 미얀마 군인들 (CG) [연합뉴스TV 제공]

‘받았으니 더하여 돌려준다.’ 아이들을 죽이고,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는 일에 합당한 논리가 있을 수 없다. 전쟁은 소수 사람의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어난다. 당신이 믿는 신이, 당신이 믿는 신념이 종교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라고 지시하고 면죄부를 줄 리가 없다. 신은 인간을 바른길로 이끌고 무한의 사랑을 베푸는 존재다. 아이와 무고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신념과 신은 잘못된 신념이고, 가짜 신이다.

그런데도 십 년을 넘게 전쟁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세계 곳곳에서 ‘받았으니 더하여 돌려준다’라는 논리로 아이들과 민간인을 포화 속에 밀어 넣고 있다. 전쟁은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가족과 터전을 잃은 국민은 전쟁 난민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이어간다. 이들이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다시 미래를 꿈꾸며 살 수 있도록 명분도, 의미도 없는 전쟁을 멈춰야 한다.

*미얀마 국민을 응원합니다. 힘내라, 미얀마!

김은희, 소설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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