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지난 하루 유럽 전역은 폭풍우에 휩싸였다. 유럽 지역 12개 축구 클럽이 유러피안 슈퍼리그(ESL)를 출범하겠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6개 팀, 스페인 라리가 3개 팀, 이탈리아 세리에 A 3개 팀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첼시, 맨체스터 시티,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유벤투스 등 이름만 대도 알만한 전통의 빅클럽이 대다수다. ESL은 유럽 전역을 아울러 20개 팀이 참가하는 리그다. 저 12개 팀에 더해 3개 팀을 고정 멤버로 참여시키고 나머지 5개 팀을 자국 리그 성적에 따라 초청하겠다는 개요로 짜여 있다.

이미 유럽 축구계에는 유럽축구연맹 UEFA가 주관하는 유러피안 챔피언스 리그(UCL)가 대륙 내 클럽 대항전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슈퍼리그는 각국 빅클럽들이 챔피언스 리그를 대체하는 대안으로 내놓은 플랜이다. 이 지점에서 기존 제도 및 이해관계 당사자들과 거대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축구는 유럽을 대표하는 스포츠다. 각국 시민들의 일상에 오랜 세월 풀뿌리로 얽혀 있었고, 관광 및 미디어 산업 등 여타 국가 산업과도 연결돼 있다. 챔피언스 리그는 EU 회원국들을 스포츠 제도를 통해 연결하고 하나로 묶는 장치였으며, 전 세계에 중계권을 파는 글로벌한 리그가 된 지 오래다. 슈퍼리그 출범은 스포츠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일대 격변을 부르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플로렌티노 페레스 레알 마드리드 회장 겸 ESL 초대 회장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슈퍼리그는 현재 창설을 주도하며 초대 회장을 맡은 레알 마드리드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즈가 10년 전부터 구상하던 아이디어라고 한다. 지난 몇 년 사이 꽤 구체적인 플랜까지 뉴스로 보도되었지만, 급물살을 타게 된 배경은 빅클럽들이 팬데믹으로 입은 재정적 타격이다. 슈퍼리그는 미국 금융기업 JP 모건이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며 창립 멤버 클럽들은 참가 수입으로 4억 달러 이상을 수령할 것이라고 한다. 이 액수는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이 얻은 수익의 4배 이상이다. UEFA의 챔피언스 리그 개편안 발표를 앞두고 슈퍼리그 출범이 기습적으로 공표된 상황이다.

유럽 현지에서는 대대적인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슈퍼리그 출범으로 기득권을 빼앗길 위기에 직면한 UEFA와 FIFA는 슈퍼리그 참가 선수들의 월드컵 출전 자격을 뺏을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EPL, 라리가 등 각국 축구협회는 물론, 슈퍼리그에 참가할 수 없는 중소 리그 협회 및 중소 규모 클럽들, 슈퍼리그에 참가하는 클럽 팬들까지 성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영국 정부까지 나서서 자국 클럽들의 슈퍼리그 참가를 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슈퍼리그에 참가하는 클럽들에게 치안 및 재정상의 지원을 철회할 것이며 해외 국적 선수 영입을 규제할 것이라 경고했다. 즉, 슈퍼리그를 둘러싼 전선은 소수의 빅클럽들과 나머지 유럽 축구계 전체로 양분되는 상황이다. 상식적인 수준 이상으로 반발이 강력하고, 현실적인 난관이 거듭 솟아오르고 있어서 슈퍼리그가 구상대로 출범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전선에는 몇 가지 전통적이고 구조적인 공동체적 쟁점이 매설돼 있다. 스포츠적 가치와 재정적 가치, 로컬적 전통의 고수와 글로벌화 증폭의 파도 그리고 평등을 향한 지향과 효율성을 향한 지향의 대립이다.

슈퍼리그를 둘러싼 대립에서 가장 논쟁적인 대목은 사실상 승강제가 없는 엘리트 클럽들의 자족적 리그라는 사실이다. 새로 초청되는 다섯 개 클럽을 제외한 나머지 15개 클럽은 성적에 관계 없이 무조건 슈퍼리그에 고정 멤버로 잔류한다. 매 시즌 각국 리그 성적에 따라 대회 진출 팀을 선발하는 챔피언스 리그와 배치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유럽식 스포츠 리그 모델에서 승강제가 존재하지 않는 미국식 스포츠 리그 모델로 전환되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이것이 경쟁의 장을 통해 누구나 챔피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스포츠 정신, 유럽이 공유해 온 축구란 스포츠의 로망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한다. 실제로, 슈퍼리그가 출범하면 챔피언스 리그는 유명무실해질 것이며 그와 연계해 열기와 수익을 창출해온 각국 리그 역시 주변화 될 가능성이 높다. 빅클럽들과 중소 클럽들 간 재정 규모는 돌이킬 수 없이 양극화될 것이다. 빅클럽들은 압도적인 재정적 우위를 바탕으로 선수를 사들이고 글로벌 중계료를 독점적으로 벌어들이는 등 슈퍼리그의 경쟁력을 차별화할 것이다.

UEFA 챔피언스리그 트로피 [AFP=연합뉴스 자료사진]

이건 빅클럽들이 강력한 연고지 문화를 바탕에 둔 기존의 로컬적 기반에서 상당 부분 분리된 채 글로벌한 좌표 위에서 카르텔을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지 빅클럽 팬들은 이 지점에서 실망과 분노를 토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정부 역시 자국 문화와 경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프리미어 리그가 약화되고, 축구 산업의 로컬적 기반이 상실-유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보호 무역’의 관점에서 슈퍼리그 출범을 저지하는 것 같다.

결국 스포츠를 넘어선 보편적 관점에서 현 사태가 주는 시사점 하나는 이런 것이다. 지난 수십년 간 세계 경제와 문화는 세계화를 통해 진화해 왔었지만, 팬데믹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단절하는 동시에 일국 내 로컬 경제 역시 황폐화했다. 이런 이중의 위기에서 스포츠 경제 시장 최상위 참여자들이 외부 유입 자금에 대한 의존성을 높여 로컬 시장을 주변화하고 완전히 글로벌화된 독자적 시장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팬데믹 시대에 세계 경제 일각에서 나타난 사건으로서, 중국 자본 유입 및 중국에 대한 음반 수출 의존도 상승이 국내에서 논란으로 비화된 한국 문화산업의 동향과도 연결지어 볼 부분이 있다.

번외로 특이한 현상을 한 가지 꼽자면, 한국 해외 축구 커뮤니티에선 현지 여론과 반대로 슈퍼리그에 열광하는 반응이 주류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현지의 사회문화적 조건과 괴리된 채 지구 반대편에서 빅클럽을 중심으로 팬덤을 형성한 이들이기에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슈퍼리그 출범에 찬성하는 것을 넘어 그것에 반대하는 현지 여론을 맹렬하게 성토하는 모습마저 보이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중소 클럽들의 반발을 엘리트들의 발전을 붙잡는 ‘떼쓰기’라 규정하며 한국의 사회적 약자들에 빗대서 빈정거리는 게시물들도 보인다. 유럽 축구계에서 일어난 일대 사건은 해외 축구 팬덤을 구성하는 한국 젊은 남성 일부의 사회관을 비춰 주는 프리즘의 역할도 해주는 셈이다. 이들은 평등보다 효율성을 지지하며, 약자보다 강자에게 매혹된다. 비록 그들 절대다수가 현실에서 해외 축구 리그의 중소 클럽들과 같은 처지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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