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 실눈뜨기] 중학생, 대학교 신입생, 직장인. <죽은 시인의 사회>를 세 번 봤다. 첫 관람은 교실이었다. 어느 과목 선생님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수업 대신 영화를 틀어줬다. 감동하면 지는 것 같은 15살이었다. 명대사, 명장면마다 딴지를 걸어 억지웃음을 끌어냈다. 관람을 방해받은 친구들에게 늦게나마 미안함을 전한다.

수능을 마치고 어렵사리 입시에 성공한 후에 다시 <죽시사>를 꺼냈다. 단답형, 주입식 교육의 터널을 빠져나오니 방종과 나태의 나라였다. '대학만 가면 다 된다'가 틀린 말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주입식 교육의 굴레는 예상보다 무거웠고 스스로 탐구해야 하는 대학교육에 결국 적응하지 못한 채 학사모를 쓰고 사회에 끌려 나왔다.

세 번째 관람을 마치고야 감독의 이름을 찾아봤다. 감독의 이름은 피터 위어. 뜻밖에도 호주 사람이었고 잊지 못할 독특한 수식어가 두 개 있었다. 영화보다 덜 유명한 감독, 사려 깊은 상업 감독. 다행히 신입생에서 사회인이 되기까지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 두 편을 운 좋게도 볼 수 있어 수식어의 의미를 어렴풋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작품은 <행잉록에서의 소풍>, <트루먼 쇼>이다.

1975년 작품인 <행잉 록에서의 소풍>은 피터 위어를 주목받는 감독 명단에 올린 작품이다. 배경은 1900년 밸런타인데이. 호주의 명문 사립여고 애플야드의 학생들이 근교의 거대한 바위산 행잉 록으로 소풍을 떠나는데 예상치 못하게 학생 3명과 선생님 1명이 실종된다. 마지막까지 실종 이유와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이 독특하고 답답한 스릴러는 폐쇄적이며 엄숙하고 억압적인 학교와 교사, 이에 반해 이교도적이고 미스테리하며 동성애 코드가 잔잔하게 공유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대비시킨 독보적인 분위기로 주목을 받았다.

1999년 선보인 <트루먼 쇼>는 <행잉록에서의 소풍>의 주요 키워드인 ‘폐쇄성’을 극단적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주인공을 가두는 폐쇄적인 공동체는 급기야 한 사람의 24시간을 카메라로 몰래 훔쳐보고 전 세계에 생중계한다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진화한다. 피터 위어는 억압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통제를 통한 폭력을 10여 년 간격으로 보여준 셈이다. 1989년에 개봉한 <죽시사>는 역시 엄격한 사립학교를 배경으로 강요된 역할로 고통받는 학생을 다루며 동시에 ‘성장 영화’라는 키워드로 두 작품의 느슨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불화와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성장 영화

<죽시사>는 모범적인 성장 영화다. 학생과 교사가 주연이라서만은 아니다. <죽시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성장 영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족영화가 아니다. 성장 영화의 주인공은 가족과 불화한다. 닐(로버트 숀 레오나드)은 연극을 하고 싶지만 닐의 부모는 의사가 되라고 다그친다. 말을 듣지 않자 군사학교에 보내버리겠다는 말로 닐을 구속한다.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토드(에단 호크)의 부모는 학업에만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토드는 지난번 생일과 같은 만년필 세트를 받았고 또 받을 예정이다.

둘째, 희망을 좇지 않는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동아리의 이름에서부터 등장한 죽음은 주인공들을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이끈다. 닐과 토드가 희망인 줄 알고 좇은 길은 결국 비극으로 향하고 말았다. 어떤 이는 삶의 의지를 잃었으며, 똘똘 뭉칠 줄 알았던 우정은 깨지고 흩어졌다. 존경하는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암스)은 학교를 떠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지루하게 학창 시절도 이처럼 언젠가는 끝이 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불화와 비극이 어떻게 성장 영화의 특징이 될 수 있을까. 성장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성장은 영원히 나를 지지하고 감싸주기만 할 것 같던 가족, 고민을 나누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친구와 더 돈독한 관계를 쌓아 가는 게 아니라(물론 필요한 일이다) 작고 편안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거칠고 넓은 바깥세상으로 시선을 돌려 개인의 가치관을 세우고 지켜가는 과정이다.

닐과 찰리가 없어서 더 쓸쓸한 교실. 키팅 선생님을 대신해 들어온 교장 선생님은 교과서를 펼치고 찢어버린 서문을 읽으라고 한다. 다시 좌표를 그려가며 객관적 기준(?)을 외워 시를 평가해야 할 수업 시간. 키팅 선생님이 쓸쓸한 표정으로 들어와 남은 짐을 챙기고 뒷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친구들 앞에서 농담 한마디 못하던 내성적인 토드가 가장 먼저 책상에 올라가 외친다. 오 캡틴, 마이 캡틴! 학교는 그대로지만 토드는 그렇게 성장했다.

<죽시사>를 평범한 성장 영화가 아니라 뛰어난 성장 영화로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엔딩씬에서 자연스럽게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는 도전적이고 세심한 연출이다. 중요한 대사를 마지막까지 꽁꽁 숨겨두는 평범한 성장 영화와 달리 핵심 메시지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영화 시작 10분 만에 등장한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처음부터 던져지고 나머지 러닝타임은 닐과 토드와 친구들이 카르페 디엠을 실천해가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

영화를 세 번째 보고서야 전에 하지 못한 질문이 떠올랐다. ‘현재를 즐기라’는 <죽시사>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할까. 영화가 한국에 처음 개봉한 80년대 후반에는 전교조가 처음 등장한 시기다. 참교육에 대한 기대 섞인 분위기를 타고 흥행 5위에 들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나 역시 <죽시사>처럼 교양 있는 억압보다는 일단 두들겨 맞고 시작했던 <말죽거리 잔혹사>에 가까운 학창 시절을 보낸 탓에 키팅 선생님에게 일방적인 지지를 보낸 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영화를 틀어주면 공감할 고등학생이 몇이나 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1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하고 바짝 공부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던 수능 세대가 중학교부터 내신, 학생부에 신경 써야 하는 학종 세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공부하고 싶은데 갑자기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가 마음대로 걸어보라는 국어 선생님의 수업방식은 또 다른 폭력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

<죽시사>를 다시 봐야 한다면 이 지점이 아닐까. <죽시사>와 함께 한국사회에 등장한 전교조가 뿌리내린 지도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올바른 교육법에 대한 논란은 멈추지 않는다.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지만 성공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대면 수업의 확대로 학습격차가 커지고 있다고도 하는데 딱히 대응책은 보이지 않는다. 학생 수는 줄어만 가는데 어느 시대, 어느 교실에도 들어맞는 단 하나의 완벽한 교육방식은 없다는 방증만 늘어만 난다.

결국 ‘현재를 즐겨라’는 말은 자유를 빙자한 방종을 누리란 말도 아니며, 현실과 무조건 타협하라는 말도 아니다. 현재에 충실하되 최선을 고민하기. 교실을 떠났어도 교육에 대한 고민은 놓지 않기. 이제 책상에 올라가 떠나는 캡틴을 바라보기보다 죽은 시인의 전설을 남기는 캡틴이 되어야 할 세대의 새로운 카르페 디엠 찾기. 그것이 우리의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다는 증명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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