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정의철 칼럼] 코로나19로 수면 위로 떠 오른 축적된 불평등에 대해 공부하면서,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요즘 새로운 연구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배우는 중이고, 고정된 정의는 없지만, ‘프레카리아트’는 코로나19 전부터 축적되어 온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무한 탐욕이라는 맥락 속에 사회보장 체계밖에 머물 수밖에 없는 불안정 노동자, 빈곤층, 장애인, 이주민, 홈리스 등 광범위한 약자·소수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프레카리아트’는 생계를 위해 감염과 과로, 사고 위험에도 일해야 하고, 실직과 해고가 감염보다 더 큰 위기일 수 있으며, 고용/소득 불안정 속에 건강위기와 함께 생존 위기를 심각하게 겪는 계층이다. 이들은 불평등 담화의 위계에서도 가장 아래에 속해 있으며, 부동산, 일자리 등 사회적 담론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할 역력도 없고’, ‘권리를 말할 권리도 없는’ 상태에 있다는 연구자들의 지적은 적절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정치권에서도, 언론에서도 이들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거대 도시 두 곳에서 보궐선거가 한창이다. 다양한 정책과 주장이 공약이라는 형식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필요성/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당선을 위해 급조된 공약들이 많고, 경쟁적으로 숙고 없이 내놓다 보니 논리적이지도 현실적이지 않거나, 황당하기까지 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동권은 물론, 정보와 정책에 대한 접근/이용에서 축적된 불평등을 겪어 온 장애인들을 위한 문화복지 공간을 대놓고 현수막까지 설치하며 반대하다가 장애 당사자들과 시민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서야 철회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서울시, 아니 대한민국의 인권 수준을 수십 년 전으로 보고 공약을 개발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 사이 대한민국의 인권과 공동체 의식은 조금씩 진전되어 왔는데, 이런 사태를 보니 퇴행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편의점에서 1시간 아르바이트 하고 무인점포 운운한 건, 상식적이지도 않고 따뜻함도 없어 보인다. 고매한 지식을 바탕으로 뭔가 가르칠 것이 있었겠지만 시민, 특히 서민들은 납득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일자리 구하기 힘든 불안정 노동자 등 ‘프레카리아트’의 삶에 결정타를 가하겠다는 것인가? 정책적 비전과 의도와 무관하게 약자 입장에서 공감하는 자세와 다가감이 공약과 정책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선거와 관련해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언론의 역할이 막중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 개입하기 힘든 서민의 입장에서는 언론을 통해 정치 등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니,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 기조에서, 공약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비판보다 거대 양당 후보에게 동등한 비중을 두는 수평적 균형 보도만 하면 언론이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선거는 다양한 계층들의 욕구가 분출하고, 정책으로 반영되는 교두보가 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포함한 ‘프레카리아트’의 목소리 부재가 재확인되는 장이기도 하다. 후보들이 당선을 위해 인기 영합 정책에 치중하더라도 언론은 코로나19에 더해, 위장전입과 탈세, 다주택 등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탐욕과 반칙, 경쟁적 내로남불의 결과인 나날이 커지는 불평등과 박탈감으로 고통받는 ‘프레카리아트’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 후보자들의 공약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를 전하면서 공론장을 주도해야 함에도, 정치인들의 동선을 따라다니거나 여론조사 등 흥미 위주 뉴스를 쏟아내며 무슨 내용으로 경쟁하는지가 아닌, 누가 앞서는지에만 치중하는 ‘경마식 보도’가 횡행하고 있다.

언론이 관료, 수사기관, 사법부, 기업, 대학의 적폐와 위기를 부각하고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언론의 행태도 수십 년간 개선된 지점이 별로 보이지 않고,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 사회 다수를 차지하는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일관된 무관심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프레임(frame)’은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떤 측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문제 정의와 대안 모색을 다르게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론의 영향력을 잘 설명하는 개념이다. 어떻게 프레이밍 하는지 못지않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무보도 프레임’이다. 다양한 계층들의 욕구가 분출되는 상황에서 공론장 역할이 중요한 선거 국면에서 ‘프레카리아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주변화되어 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똑같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팬데믹 이전부터 불평등과 차별을 겪어 오던 장애인, 불안정 노동자, 이주민, 성소수자 등 ‘프레카리아트’의 고통은 배가되어왔다. 돌봄과 지원단절로, 밀집·밀폐된 환경에서 생계를 위한 노동을 피할 수 없어서,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들은 감염병 위기 때 더 큰 불평등과 차별, 심지어 혐오로 고통받는다. 이러한 ‘프레카리아트’의 삶에 대한 거대 정당들의 진지한 관심과 언론의 주목은 찾아보기 힘들다. 재난, 특히 감염병의 확산과 피해는 공평하게 전개되지 않으며, 불평등한 구조를 반영한다.

기계적인 균형성, 공정성의 잣대를 넘어 축적된 불평등과 차별로 둘러싸인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시민이 원하지도 않는 속보/특종 경쟁에 쫓기면서 공부하지 않는 풍토에 대해 이해해 달라거나 현장을 모른다는 불평은 삼가기 바란다. 시민의 실망과 분노가 임계치에 다다르기 전 언론의 혁신 노력을 요청하며, 시민들의 적극적인 언론 감시와 개혁 노력에 대한 동참도 강조하고 싶다. 관성을 넘어 변화를, 익숙한 취재처/엘리트 중심을 넘어 ‘프레카리아트’와 서민의 이슈를 중심으로 의제화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언론의 성찰과 분골쇄신을 요청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언론만이 할 수 있는 소중하고 막중한 공익적 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고, 시민, 특히 서민의 사랑을 받는 언론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정의철 상지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부 교수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899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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