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수현 기자] 디지털성범죄는 취재하기 곤란한 주제 중 하나다. 피해자를 취재하는 것 자체가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으며, 사건을 상세히 서술하면 자칫 부정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문제를 드러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드러나는 디지털성범죄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되는 디지털성범죄의 심각성과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디지털성범죄 피해자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가혹하기만 하다. 박사방·n번방 사건 등으로 수많은 피의자가 입건되고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유사 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디지털성범죄 정보는 단기간에 급속도로 확산되고 피해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계자는 과거 미디어스와의 인터뷰에서 “피해자가 고인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힘이 다 빠진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따라서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이뤄져야 한다. 정부의 디지털성범죄 대응은 ▲피의자 검거 ▲정보 삭제·차단 등 두 축으로 이뤄진다. 근본적인 대응은 경찰·검찰 등 수사기관이 디지털성범죄 정보를 유포하는 피의자를 검거하는 일이지만 이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피해자 입장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관련 정보 삭제·차단이다. 정보 삭제·차단이 당장의 피해를 막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보 삭제·차단 권한을 가지고 있는 방통심의위가 선제적으로 대응에 나서야 피해자가 일상의 궤도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5기 방통심의위 출범이 지연되면서 디지털성범죄 삭제·차단 기능이 마비됐다. 4기 방통심의위 임기 만료 후 접수된 디지털성범죄 안건은 18일 기준 4291건에 달한다. 이 중 2830건은 심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방통심의위 출범 지연으로 수천 건의 디지털성범죄 정보가 온라인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디지털성범죄 사건도 연이어 발생했다. 최근 A씨는 여성 100여 명의 개인정보와 디지털성범죄 정보를 다크웹(비공개 인터넷)에 유포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가 유포한 정보들이 온라인에서 재유통되고 있지만 방통심의위가 가동되지 않아 막을 방도가 없다. 또한 ‘제2의 소라넷’이라 불리는 성인사이트가 적발되고 경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관련 정보를 삭제·차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상황이 심각하지만 방통심의위 구성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정치권은 묵묵부답이다. 4기 방통심의위 임기가 만료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차기 위원회 출범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이 청와대·더불어민주당 추천 인사를 문제 삼고 위원 추천에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청와대 추천 인사가 확정되기 전까지 위원을 추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이 위원 추천을 오는 4월 7일 서울·부산시장 재보선 선거 뒤로 넘길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다.

2014년 3기 방통심의위 출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박효종 위원장 내정자가 편향된 역사관을 가졌다며 인선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방통심의위 출범을 지연시키지 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박 위원장 내정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상임위원회 의결에 응했다.

청와대 역시 방통심의위 출범 지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청와대가 선제적으로 추천 인사를 발표해 국민의힘을 압박할 수 있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기 방통심의위 출범 당시 대통령은 국회의장보다 추천위원을 먼저 발표했다.

정치권이 공전을 벌이며 방통심의위 출범을 지연시키는 사이, 디지털성범죄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악성 이용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디지털성범죄 정보를 확산시키고 있다. 정치권은 디지털성범죄의 심각성을 몰라서 방통심의위 출범에 나서지 않는 것인가,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것인가. 청와대와 국민의힘이 정쟁을 멈추고 방통심의위 출범에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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