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동원 칼럼] 지난 3월 9일 시민단체인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사건 공동행동'이 "보궐선거 왜 하죠?"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게시하기 위해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에 공직선거법(이하 선거법) 위반 여부를 문의했다. 선관위의 답변은 “선거법 위반”이었다. 이틀 후 이 단체는 “나는 성평등에 투표한다”, “나는 페미니즘에 투표한다” 등의 현수막 문구에 대해 선관위로부터 같은 답변을 받았다.

선관위는 선거법 제90조(시설물설치 등의 금지)를 근거로 “나는 성평등에 투표한다”는 현수막 문구가 선거법 위반이라고 설명했다. 내게는 낯설지 않은 답변이었다. 작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같은 답변을 들은 기억 때문이다. 회원으로 있는 동대문구 한 마을공동체에서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성평등에 투표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바로 철거된 일이 있었다. 철거한 기관은 서울시선관위였다. 철거 사유를 물어보니 돌아온 답변은 “4월 15일 총선을 앞두고 셩평등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공약을 내건 후보는 한 명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의아했던 것은 당시 동대문갑 선거구의 후보가 공개되지 않았음은 물론 후보별 공약집도 나오기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선관위 규탄하는 시민단체 퍼포먼스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정치참여 권리를 불허한 선관위 규탄" 기자회견에서 선관위 복장을 한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 관계자가 캠페인 문구에 위반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들은 "보궐선거 왜 하죠?"라는 문구와 성평등이라는 단어를 선거법 위반이라며 사용할 수 없다고 한 서울시 선관위의 결정을 규탄했다. ⓒ 연합뉴스

현수막을 건 단체는 다르지만 이번 보궐선거에도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새로운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 이전부터 늘 있었다는 뜻이다. 해당 조항이 포함된 선거법을 보자. 제7장 선거운동은 모두 61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선거운동이란 “당선되거나 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제58조1항)를 말한다. 그러나 “선거에 관한 단순한 의견 개진 및 의사표시”, “입후보와 선거운동을 위한 준비행위”, “정당의 후보자 추천에 대한 단순한 지지·반대의 의견개진 및 의사표시”, “통상적인 정당활동”, 명절이나 종교 기념일 등의 시기에 “의례적인 문자메시지를 전송하는 행위”는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법령이 그렇지만 선거법의 선거운동 관련 조항들은 행위에 대한 금지와 허용 여부만이 있을 뿐, 그 행위 주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위조항들을 보면 그 행위주체가 대부분 선거에 나선 정당, 후보, 선거운동원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제58조(정의 등)2항에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행위 주체는 밝히지 않고 그 행위만으로 위법성을 따지는 것은 역설적이다.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성평등’ 현수막의 사례가 그렇다. 제90조1항은 아래와 같다.

”누구든지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이 법의 규정에 의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이 경우 정당의 명칭이나 후보자의 성명·사진 또는 그 명칭·성명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명시한 것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위 조항에서 “누구든지”는 잠재적 선거운동원을 뜻한다. “성평등에 투표”하겠다는 현수막을 통한 시민의 입장 표시가 선거법 위반이 되는 것은 유권자(법령에 따르면 선거인)가 현수막을 걸 때 그는 바로 선거운동원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본 제58조2항의 정의처럼 선거운동의 주체는 명시하지 않고 바로 어떤 행위가 선거운동인지만을 규정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역설이다. 예컨대 “중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소지자는 중국요리를 만들어 상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행위로 주체를 규정할 경우 “중국요리를 만드는 모든 사람은 중국인”이 되어버린다. 결국 선거법, 특히 선거운동에 관한 조항들은 선거운동에 뛰어들 정당이 합의한 ‘게임의 룰’이다. 정당, 후보, 또는 선거운동원들에게 적용해야 할 규제가 명확한 주체의 부재로 인해 모든 시민과 유권자에게 적용되는 규제로 확대된 셈이다.

“나는 성평등에 투표한다”는 현수막 문구에서 “나”는 이렇게 특정 정당의 당원이나 선거운동원으로 규정된다. 법령상에 “누구든지”란 정치적 선택과 의견, 질문을 제시할 시민과 유권자가 아니라 이미 ‘기표소에 들어간 유권자’, 즉 선거일 180일 전부터 어떤 정당과 후보를 지지할지 결정한 ‘잠재적 선거운동원’으로 간주된다. 선거법이 특정 후보나 정당이 아니라 시민의 모든 정치적 의사표시에 대한 금지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선거법이 모든 시민을 “이미 후보를 결정한 유권자”로 제약함으로써 정치적 활동을 정당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만 바라보는 관점이다. 선거법에 등장하는 이들은 정당, 후보자, 선거인(선거권자), 피선거권자뿐이다. 차라리 ‘선거운동원’의 정의를 만들고 등록제로 이들의 활동을 일반 시민들의 의사 표현 행위와 구분 짓는 것이 낫다. 그러나 선거법이 선거운동원에 대한 정의를 하지 않는 까닭은 정당과 후보만을 위한 법이기 때문이다.

무효표와 기권표를 던질 자유, 각 정당과 후보에게 선거공약을 요구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자유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인정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 특히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이렇게 구속되어 왔다.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라는 수식어는 정치인들에게만 해당한다. 도리어 우리에게 선거란 ‘그들만의 민주주의’임을 확인시켜주는 순간이 아닌가.

* 김동원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협력실장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898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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