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혜인 기자]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이후 제대로 된 논의 없이 9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트렌스젠더 인권 활동가인 김기홍 씨와 변희수 전 하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와 관련해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인권위원장은 “차별금지법 제정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 절대 아니고 우리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18일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위한 법과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를 주최한 민주당 인권위원회는 지난 16일 성소수자분권위원회를 개설하고 위원장으로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기획단에서 활동한 해영을 위촉했다.

18일 이룸센터에서 열린 <성소수자 혐오 차별 근절과 인권 보장을 위한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 좌장은 권인숙 의원이 맡았다. 발제는 이호림 고려대 보건과학과 박사수료, 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 토론에는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이승현 연세대학교 강사·법학박사, 해영 민주당 인권위 성소수자분과위원장이 참여했다. (사진=권인숙 의원 페이스북)

토론자들은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 정부를 비판했다. 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는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말한 뒤 지금까지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에서 집권 여당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당시 한국에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밝혔고, 당선 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걸고 당선된 뒤 인권위 내에 차별금지법제정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2007년 보수 개신교계의 반대로 차별금지사유에 ‘성적지향’ 등 7개 사유가 삭제된 채 법안이 폐기됐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통합당 후보로 ‘문재인의 10대 인권정책’에서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과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의 인권 보장”을 약속했다. 하지만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동성애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591명의 트렌스젠더를 대상으로 “현재 문재인 정부가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87%가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노력하고 있다’는 5.1%에 불과했다.

2020년 트렌스젠더 59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 (자료출처=이호림 발제자료)

한채윤 이사는 “문 대통령이 당선 후 발표한 100대 정책 과제에는 성소수자 인권을 보호하는 정책이 포함되지 않았다”며 “2018년 3월 유엔인권이사회가 문 정부에 보낸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도 불수용했다”고 말했다.

한 이사는 “성소수자 인권과 차별금지법 관련 논의가 나오면 민주당은 ‘시기상조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국민 공감대가 높아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라며 “성소수자들이 혐오와 편견으로 희생되는 사이 법 제정 권한을 가진 정치인들이 ‘나중에’를 말하는 건 정치가 혐오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 이사는 “국회는 눈치 보지 말고 2003년부터 논의하고 준비한 대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법 제정을 통해 적극적으로 편견과 혐오가 줄어들도록 해야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과 인권을 존중하자는 국민 공감대가 빠른 속도로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변희수 하사가 비범해서 싸울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본인이 쌓아온 경험에서 비롯된 용기”라며 “변 하사의 용기가 경험을 통해 만들어졌듯 민주당의 용기도 경험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국회를 향해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 입장을 내도 낙선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달라. 보수표를 잃으면 떨어진다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달라”고 말했다.

해영 민주당 인권위원회 성소수자분과위원장은 “민주당에서 성 소수자 단어를 꺼내는 건 해리포터가 볼드모트란 이름을 꺼내는 것과 같았다”며 “민주당 내 성소수자분과위원회 개설은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해영 위원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하려 했지만 하지 못한 일들을 두고 누군가는 늦었다고 할 수 있지만 분과위원회 개설은 성평등 사회를 위해 민주당이 책임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라며 “저도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만으로 존중받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 내 성소수자분과 활동 계획에 대해 해영 위원장은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 퀴어 축제의 광장 사용을 넘어선 논의와 정책들이 나와야 한다”며 “생활 전반에 성소수자들을 위한 의제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함께 의제를 발굴해 나가자”고 말했다.

지난해 6월 29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 제안설명 이후 국회에서 단 한번도 논의되지 않았다. 장 의원은 “법사위 양당 간사에게 계속해서 심의를 요청하고 있지만 확답을 받지 못한 상황”고 토로했다.

권인숙 의원은 “민주당에서는 보궐선거 이후 차별금지법안이 나올 예정”이라며 “그동안 여러차례 입법이 좌절됐던 트라우마가 구성원들에게 남아 있다. 장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을 공동발의했을 때 일주일 동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이제 더이상 현실을 묵과할 수 없는 시점이 오고 있다는 걸 느낀다”며 “이 사안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게 절대 아니고 우리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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