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음악 재생 매체의 편의성이 발달할수록 그것으로 재생하는 문화 콘텐츠는 삶과 접촉면이 얕아지는 역설이 일어난다. CD플레이어 시대엔 앨범 단위로 음악을 소유할 수밖에 없었다. 열 곡 남짓의 트랙이 정규 앨범, 드물게는 'MAX'와 '동감' 같은 국내외 히트 가요 컴필레이션의 묶음 단위로 팔렸고, 매장에 찾아가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샀다. 그렇게 장만한 CD 한 장을 외출할 때 챙겨 나와 회전 휠이 닳도록 돌렸다. 그 앨범은 하루를 빼곡하게 채웠다. 아니면 몇 장 더 여분을 챙기거나 CD 파우치에 CD를 담고 나가 번갈아 가며 돌렸다. 노래에서 노래, 앨범에서 앨범으로 넘어가는 일이 번거로웠고, 그래서 노래 하나, 앨범 하나에 오래도록 머물러야 했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천 년대에 나타난 MP3 플레이어는 음악에서 물질성을 벗기고 저작권을 따돌린 채 음악을 공유하며 '소리 바다'를 창조했다. 음악과 음악 사이 경계망이 눕혀졌지만 아직은 음악을 듣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인터넷으로 음원을 찾고 컴퓨터에 내려받은 후 코드를 꽂아 재생 기기로 보내야 음악을 휴대할 수 있었다. MP3 기기는 많게는 몇 기가 정도, 적게는 256메가 정도 파일 저장 용량이었다. 트랙을 음원으로 압축해서 CD 포맷에 비해 훨씬 많은 노래를 담을 수 있지만, 한 번 기기에 음악을 채우면 다음번에 새 노래를 집어넣을 때까지 그것만 들어야 했다. 음악을 듣는 데 물리적 제약이 걸릴수록 음악은 반복해서 삶을 문질렀다. 그 앨범의 트랙 순서, 그 노래의 편곡 구성이 어떤지, 가사와 멜로디가 무엇인지, 굳이 기억하길 원치 않아도 두뇌 피질 속에 남았다. 노래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반복해서 함께하며 그 시간들을 가사화, 음률화했다. 낱개의 노래가 흘러가는 삶의 장면들에 깊숙이 들러붙은 것이다.

그리고 2010년대가 왔다.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시대가 열리며 음원에 대한 접근성과 기동성에 한계가 옅어졌다. 스마트폰 음원 플레이어 앱을 켜고 검색창을 두드리면 거의 모든 시대와 장르가 무진장 소환된다. 스트리밍 서비스 가입 요금이 몇천 원이라면 그것으로 거래되는 노래 한 곡의 값어치는 0원에 가깝다. 플레이 리스트엔 음악이 넘쳐 난다. 클릭 몇 번에 리셋하고 다시 채우면 된다. 사실 그런 과정도 번거로워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시간 차트 듣기 버튼을 누르면 순식간에 최신가요 백곡이 대령되니까. 쉽게 얻는 만큼 쉽게 지우고 쉽게 갈아 치운다. 앨범 한 장에 갇혀 있을 이유도 제약도 없다. 00년대까진 이동 시간과 대기 시간 등을 때울 수 있는 놀이가 귀에 이어폰 꽂기 정도였지만, 지금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음악은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BGM에 머문다. 음악은 삶의 전 방위에 포진돼 있지만 삶의 표면을 겉돈다.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노래가 머리에 잘 새겨지지 않는다.

같은 음원 포맷의 음악이라 해도, MP3 기기로 들은 앨범들은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십 년 전 이맘때 사골을 우린 앨범은 GAME의 'Doctor's Advocate'였다. 웨스트 코스트 풍의 트랙들로 개시해 'Why You Hate The Game'의 장대한 편곡으로 커튼을 내린 구성이 들릴 듯 떠오른다. 하지만 지난주 스마트폰으로 들은 노래는 잘 기억나지 않고 앨범을 끝까지 들은 적도 많지 않다. 00년대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즐겨 쓴 "내 고등학교 야자 시간을 함께 한 투팍의 노래" 같은 부류의 가사들이 예전만큼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스포티파이 제공=연합뉴스]

음악이 귀했던 구십 년대 이전과 음악이 넘쳐 나는 이천십 년대 이후에 비해, 그 사이 과도기에 음악을 들었다는 건 특별한 성격이 있다. 어지간히 마음을 먹으면 어지간한 음악은 구할 수 있었고, 듣고 싶은 음악을 기기에 담고 재생하는 소유 의식을 거쳐 반복해서 들었다. 다시 말해, 구십 년대와 이천 년대는 음악이 추억과 동기화되기 가장 유리한 환경이었다. 이천 년대 말 예능 방송 출연에 힘입었던 칠십 년대 세시봉 멤버들의 귀환은 회고라고 할 만한 잔잔하고 상념 어린 반향을 일으켰지만, 무한도전 '토토가'는 회한이라 할 만한 격정적이고 절절한 반응을 불렀다. 후자야말로 복고ᆞ와 향수란 수식어가 어색한 나이대 사람들이 들었던 노래를 다시 부른 무대인데도 말이다. 구십 년대가 호황의 마지막 '좋은 시절'이었고, 그 시절을 유년기로 거친 에코 부머들이 현재 고된 삶을 살고 있다는 사회학적 분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와 지금의 음악 소비 환경 차이에도 원인이 있다.

2020년대의 음악 역시, 더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만큼 질펀한 응답을 얻기는 힘들 것 같다. 음악을 듣는 매체가 음원 플레이어에서 영상 박물관 유튜브로 넘어가고 있으며, 음악을 사지도 찾지도 않아도 내가 자주 듣는 음악과 트렌드에 기반한 알고리즘에 따라 추천된 음악이 자동으로 이어진다. 음악에 관한 취향을 형성하기는 수월해졌고, 음악과 취향 이상의 관계를 맺기는 조금씩 더 어려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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