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건 배우 오인혜의 노출 드레스였다. 가슴을 거의 보일 듯 노출한 드레스에 매체와 대중이 열광했고, 찬반 논란이 발생했다. 당연히 오인혜는 핫이슈로 떠올랐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조차도 오인혜가 검색순위 1위를 했을 정도였다.

사건은 개막식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인혜의 노출 드레스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폐막할 때까지 영화제 기간 내내 최고의 화제였다. 한마디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오인혜'로 시작해서 '오인혜'로 끝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인혜 노출 드레스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다.

한 여배우의 노출 드레스가 전통을 자랑하는 국가의 대표적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 전체, 감독 전체를 모두 덮어버린 것이다. 아무도 작품이나 감독의 작가정신엔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들 여배우의 노출만 쳐다봤다.

무명이었던 그 여배우는 이 일로 대스타가 되었다. 처음에 오인혜라는 이름이 포털 대문을 장식했을 때는 모두들 '오인혜가 누구야?'라고 했지만. 일주일 후에는 '아 노출 드레스의 그 오인혜구나'라고 분명히 인지했다. 황당한 건 모두가 오인혜의 이름을 알게 됐어도, 그녀의 출연작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여전히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별로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중요한 건 노출이니까.

이번 노출드레스 사태가 역사적 사건인 이유

이전에도 물론 영화제에 나타난 여배우의 노출 드레스는 언제나 화제를 모았었다. 하지만 과거엔 주로 행사일 당일을 중심으로 하루이틀 정도 인터넷에서 가십으로 오르내리다 끝나는 정도였다. 이번엔 앞에도 언급했듯이 노출 드레스가 영화제 전체를 압도했다는 점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 외엔 아무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영화제라는 본질을 여배우의 노출 드레스라는 감각성이 완전히 삼켜버린 것이다.

10년 장정의 완성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대하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게 됐다. 과거엔 태백산맥, 임꺽정, 장길산 같은 것들이 청년의 필독서였지만 이젠 아니다. 인문학, 사회과학도 읽지 않게 됐다. 가치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다. 대학 앞에 있던 사회과학 서점들이 망해갔다. 정신과 영혼이 황폐해져 갔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물질과 몸이다. 물질을 숭상하고 몸에 집착하는 시대가 전개됐다. 자극성, 감각성, 육체성이 하루가 다르게 강화됐다. 토크쇼는 막말 토크쇼로 진화하고, 가요계는 아이돌이 점령하고, 막장드라마가 맹위를 떨쳤다.

젊은 주연 배우 연기력 논란이 일상화될 정도로 배우들이 얼굴로만 배역을 따내고 있다. 아이돌 팀에선 정작 노래하는 멤버가 구석에 서고 얼굴 예쁜 멤버가 한 가운데에 선다. 이른바 '침묵의 센터'다. 가수지망생이 음악적 진정성보다 몸매, 얼굴, 개인기에 더 신경을 쓴다.

최근 2~3년 사이 육체의 섹시미에 열광하는 정도가 급격히 강화됐다. 꿀벅지, 꿀복근, 하의실종, 청순글래머 등등의 신조어가 쏟아졌다. 정신이 아니라 육체, 본질이 아니라 껍데기를 숭상하는 시대.

이번 오인혜 노출 드레스 사태는 껍데기가 본질을 먹어치웠던 10년 장정의 최정점이라 할 만하다. 레드카펫 노출 드레스가 영화제의 모든 작품을 완벽하게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사적 사건이다.

오인혜를 탓할 것인가

일각에선 오인혜를 비난하고 있다. 더 나아가 노출을 일삼는 여배우들이 문제라고 한다. 그건 아니다. 오로지 여배우 노출 드레스에만 집착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오인혜는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또, 의상도 대중예술인의 자기표현 영역이다. 의상 선택에 대해 사회적으로 과도하게 압력을 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가 배우가 입을 옷까지 지정해줘야 하는가?

문제는 우리의 태도다. 왜 그 수많은 작품과 작가들을 놔두고 레드카펫 여배우 노출에만 신경을 쓴단 말인가? 대중과 언론이 노출 드레스에만 열광하는 세태가 문제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레드카펫에서 무슨 옷을 입건 신경을 끄면 된다. 자극적인 껍데기에는 신경을 끄고 본체를 보면 된다. 영화제에 어떤 작가정신들이 나타났는지, 배우들이 어떤 연기를 했는지, 그런 것에 집중하면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김혜수의 노출이 통쾌했던 이유

김혜수가 2000년대 초에 선보인 노출 드레스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한국은 성리학이 지배했던 보수적인 나라다. 여성은 몇 겹의 치마로 몸을 동여매고, 몸과 욕망이 없는 존재로 살아야 했다. 여성의 몸의 주인은 여성이 아니었다. 가부장이 여성의 몸이 처해야 할 바를 지시했다. 김혜수의 노출은 그것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것은 '내 몸의 주인은 나다'라는 여성의 주체 선언이었고,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는 여성의 해방 선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통쾌한 사건이었고 당시 대단한 화제를 모았었다.

하지만 화제성이 문제였다. 그런 엄청난 화제성은 바로 상업적 기회를 의미했다. 배우에겐 스타성의 기회, 언론에겐 클릭수 향상의 기회였다. 김혜수 노출 이후 노출 드레스의 홍수가 일어난다. 너도나도 벗었고, 언론은 열심히 기사화했다. 대중은 욕망이 가는 대로 그 이미지를 소비했다. 결국 인간이 아닌 상업성, 상품논리만 남았다.

특히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졌다. 그에 따라 섹시한 육체미가 여성에게 아주 중요한 가치가 된다. 작품도 상관없고, 연기력도 상관없고, 단지 섹시한 육체로 여성이 스타가 되는 분위기에서, 여성의 다른 가치들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여성을 '꽃'으로 여기는 태도를 강화시켜, 결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할 것이다.

애초에 여성의 통쾌한 인간선언으로 여겨졌던 노출 드레스가 10여 년간의 상업성 질주를 통해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퇴색했다. 노출 드레스를 통한 여배우 섹시미에의 열광은 결국, '여성이 반드시 보여줘야 할 아름다움'의 전형을 사람들 머릿속에 심어, 대다수 여성들에게 새로운 억압으로 작용할 것이다. 성리학이 여성에게 정절을 강요했다면 이 시대는 적당한 정절과 함께, '얼짱 + 동안 + 섹시한 육체'까지 강요하는 셈이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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